연중시기

[순교] 유항검과 함께

오마리아

순교자 유항검과 그의 영향을 받은 순교자들을 소개합니다.

 

51.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입교한 것은 1784년 조선 천주교회 창설 직후. 호남 지역 첫 신자. 곧 ‘호남의 사도’가 된 것. 권일신에게서 교리를 배운 그는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과 친척, 이웃, 자신의 종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했다. 이제 그에게는 ‘빈부귀천’이 따로 없었다. 교회 가르침을 실천하고 모범을 보였으며, 가난한 이웃은 물론 자신의 종에게조차 자선을 베풀었다.

유항검 일가 가운데서 순교자는 모두 10위. 유항검을 비롯해 부인 신희, 맏아들 유중철(요한, 1779∼1801)ㆍ이순이(루갈다, 1782∼1802) 동정부부, 둘째 아들 유문석(요한. 1784∼1801), 동생 유관검ㆍ이육희 부부와 그의 아들 종선ㆍ문철, 장조카 유중성(마태오, ?∼1802) 등 일가족. 이 가운데 유항검과 유중철ㆍ이순이 동정부부, 유문석, 유중성 등 5위가 이번에 시복. 유항검의 남은 가족들은 노비로 끌려갔으며, 적몰 재산은 모두 호조에서 환수했다. 그가 살았던 집은 헐어 없애고, 연못을 만들었다.

 

한정흠 스타니슬라오(1756-1801)

· 김천애 안드레아(1760-1801) · 최여겸 마티아(1763-1801)

최여겸과 그의 동료들은 그 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고 마침내 1801년 8월 21일 형조는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각각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도록 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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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최여겸 마티아

윤지충과 이존창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 대단한 열성으로 신앙을 실천하며, 고향인 전라도 무장은 물론 인접한 영광, 흥덕, 함평에까지 천주교를 알리는 데 노력. 1801년 4월 한산에서 체포. 관장은 즉시 그에게 형벌을 가하며 문초를 시작하였지만 곧 어떠한 형벌로도 그의 신앙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다시 전주 감영으로 이송했습니다. 계속되는 문초와 형벌에도 꿋꿋이 신앙을 지키던 최여겸은 옥중에서 열심한 신자 한정흠과 김천애를 만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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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김천애 안드레아

유항검의 종. 양반임에도 천민을 형제처럼 대하며 허물없이 한데 어울려 하느님을 찬미하는 유항검에게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신분 차별 없이 사람을 하늘같이 존중하는 천주교 교리에 감격하여 기꺼이 입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 자신의 신분을 뛰어넘는 고결한 마음으로 신자의 본분을 정성껏 지켜 나갔습니다. 1801년 3월 유항검의 맏아들 유중철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김천애가 남긴 최후의 진술. “천주교는 큰 도리요 지극히 훌륭한 행위로, 여러 해 동안 깊이 믿어 이미 뼛속까지 사무쳐 있습니다. 제게 형벌과 죽음은 영예로운 일이니 어찌 마음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범한 죄를 돌이켜보건대, 오직 빨리 죽기만을 원할 따름입니다.”

 

46. 한정흠 스타니슬라오

전라도 김제의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출생. 먼 친척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집에 머물며 그 집 자녀들의 스승이 되어주었습니다. 유항검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 주문모 신부가 전주를 방문했을 때 성사를 받는 등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신자의 본분을 성실히 지켜갔습니다. 한정흠은 1801년 3월 유항검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혹독한 형벌과 회유에도 흔들리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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