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시기

[순교] 서로 권면하며

오마리아

혹독한 고문과 형벌 가운데 서로 권면했던 순교자들을 소개합니다.

 

73. 김강이 시몬

충청도 서산 중인 집안 출신. 장성한 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재산이 많았으나 입교 후에 다 버리고 고향을 떠나 동생 김창귀(타대오) 가족과 함께 전라도 고산 땅에 가서 살았다… 옛 하인의 밀고로 아우 김창귀와 조카 김사건(안드레아)과 함께 체포돼 안동에 수감됐다. 형벌로 인한 상처가 심한 데다가 이질까지 앓고 있어서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가 돼 끝내 옥사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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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김광옥 안드레아 

충청도 예산 여사울 중인 집안에서 출생. 오랫동안 그 지방 면장(面長)을 지냈다. 그는 50살쯤 됐을 때 같은 여사울에 살던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 자신이 입교시킨 친척 김정득(베드로)과 함께 성물과 서적만을 지닌 채 숨어 지내다가 함께 체포됐으며, 그들은 헤어질 시간이 되자 서로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형장으로 간 김광옥은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기도를 마친 다음 목침을 가져다 스스로 그 위에 자신의 머리를 뉘었다. 김희성(프란치스코)이 그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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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김정득 베드로 

친척 김광옥(안드레아)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김정득은 김광옥과 함께 교회 서적과 성물만을 지닌 채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가 숨어 살면서 오로지 교리를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어서 결국에는 포졸들에게 체포. 김정득과 김광옥은 함께 내려오다가 헤어질 시간이 되자 손을 마주 잡고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89. 김사건 안드레아

충청도 서산 중인 집안 출생. 어려서부터 부모에게서 교리를 배웠다. 유배형을 받은 김창귀가 아버지고, 그해 강원도 원주에서 옥사한 김강이는 큰아버지. 집안은 본래 부유했지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 재산을 버리고 전라도 고산, 경상도 진보, 강원도 울진 등지로 피신해 다니느라 가난해졌다. 김사건은 1815년 을해박해 때 아버지와 함께 체포된 뒤 마음이 약해져 석방됐다.. . 정해박해 때 포졸들에게 체포된 그는 상주로 끌려가 다리뼈가 허옇게 드러날 정도로 모진 형벌을 받았으나 약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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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김세박 암브로시오

한양 역관 집에서 출생.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된 직후에 신앙을 받아들인 그는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지만 가족들이 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가족과 이별한 뒤, 교우들을 찾아다니면서 교리를 가르쳐 주거나 교회 서적을 필사하면서 살았다. 그러다가 주문모 신부에게서 성사를 받았다. 그는 가끔 산중에 들어가 살면서 신심을 함양하는 데 열중하곤 했다… 형벌과 대재로 쇠약해진 탓에 옥중생활을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교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옥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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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박사의 안드레아

대구에서 순교한 박경화(바오로)의 아들로, 충청도 홍주 양반 집안 출신. 아버지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신앙 속에 자란 박사의는 모범적 신앙생활과 지극한 효성으로 주위의 칭찬을 받았다. 교우들과 함께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다 포졸들에게 체포된 그는 상주로 끌려가 모진 문초와 형벌을 받은 후 대구 감영으로 압송됐다. 대구 감영에서 노령인 아버지가 차츰 쇠약해지자 효성 지극한 박사의는 관장에게 아버지를 보살펴드릴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요청해 허락을 받았다. 그가 옥중에서 보여준 효행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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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이재행 안드레아

충청도 홍주 출신. 20세가 넘어서야 천주교 교리를 듣고 입교하였다. 본디 성격이 꼿꼿하고 관대하여 존경을 받았던 그는 신앙을 받아들이자마자 성실하게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고향에서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산골에서 은거해 살았다. 아주 가난하게 되었지만, 언제나 인내심과 박애 정신을 보여 주었으며, 가족들이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그의 기도와 독서 생활, 부지런함과 덕행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대구 옥에 갇혀 있던 신자는 이재행 안드레아와 김사건 안드레아, 박사의 안드레아 등이었다. 그들은 임금이 사형 집행을 윤허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매우 기뻐하면서, 자신들이 쓰던 물건과 옷을 다른 죄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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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세한 성인 검색은 성바오로딸수도회 ‘복자 124위’ 자료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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