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케치북

 

[이종훈] 9월 13일(연중 24주일) 연민과 용서 (+ mp3)

9월 13일(연중 24주일) 연민과 용서

 

형제를 충분히 용서했다고 생각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태 18,22). 끝까지 그리고 완전히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린다. 그래야 예수님의 제자고 하느님의 자녀다. 하느님은 우리를 끝까지 그리고 완전히 용서하신다. 외아들까지 희생시키는 사랑의 심연 속에 우리 죄를 빠뜨려서 아무도 꺼낼 수 없게 하신다. 세상에서는 죄를 고발하는 게 정의지만 하느님께는 우리 죄를 없애시는 게 정의다. 우리도 당신을 따라 정의로워지기를 바라신다.

 

자선보다는 희생이, 희생보다는 용서가 더 어렵다. 하느님처럼 용서하는 건 불가능한 것 같다. 그에게 복수하지 않고 나쁜 마음먹지 않으려는 노력만으로도 하느님께 칭찬받을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 사이에서 용서를 청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잘못한 적이 없는데 그는 내가 그랬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모르지만 나는 상처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우리는 그의 뒤에서 말한다. 그런데 그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는 걸 보면 그가 나에게 상처를 준 게 아니라 내가 상처를 입었음을 아는 거다.

 

사람이 가장 참기 힘든 감정이 억울함이고 그래서인지 사람은 화를 참지 못한다고 한다. 자기보다 약한 이들을 벌주고 혼잣말로 욕하고 만만한 돌멩이를 발로 차버리는 등 어떻게 해서든 화풀이를 하고야 만다. 그렇게 해서 화가 다 풀리고 용서하게 되면 다행이다. 그것은 반복된다. 그 억울함과 미움의 고문에서 벗어나려면 용서해 줘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역시 자신이 하느님께 용서받았고 우리도 그러기를 바라심을 기억하는 거다. 먹어 본 사람이 먹을 줄 알고, 놀아 본 사람이 놀 줄 안다. 은혜받은 사람이 은혜를 베풀고, 사랑받은 사람이 사랑하고, 용서받은 사람이 용서한다. 예수님 비유 말씀에서 만 탈렌트 빚은 천문학적인 액수라 과장법이지만 우리가 하느님께 그만큼 죄를 용서받았음은 사실이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 비유에 나오는 임금은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니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무자비한 명령을 내렸다. 그런 그가 180도 마음을 바꾸게 된 것은 그가 불쌍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임금의 마음이 바뀌는 건 의지가 아니라 연민에 의해서다. 연민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다. 괜찮은 것처럼 지내지만 우리는 괜찮지 않다. 수백수천 번 똑같은 죄를 짓고 돌아와 용서해달라고 청하는 비참한 자신을 뛰어넘을 수 없다. 노력해도 잘 안되고, 되는 듯하다가 얼마 못 가 제 자리로 돌아와 버린다. 그러니 불쌍하다. 그도 그럴 거다. 그가 그렇지 않아도 나는 그가 그렇다고 여긴다. 그러면 내 안에서 그를 풀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런데 그건 그가 아니라 나를 풀어주는 거다.

 

예수님, 주님은 일흔일곱 번이 아니라 끝까지 완전히 저를 용서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저에겐 희망이 없습니다. 이렇게 든든하게 믿는 구석이 있으니 다시 도전하고 마음은 여전히 복닥거려도 그에게 친절하게 대합니다. 그건 위선이 아니라 자유로워지려는 몸부림입니다. 이렇게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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