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케치북

 

[김대열] 2015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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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2월10일 연중 제 5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마르코7,2)

 

더럽다는 말도, 깨끗하다는 말도 상대적일 수 있는 말입니다.

더럽다거나 깨끗하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더러운 손으로 먹었다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 사람들은 단정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커다란 죄라고 믿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깨끗함과 더러움의 구분에도 식별이 요구됩니다.

정말 슬프도록 재미난 것은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참 많은 이유로 만들어진 수 많은 종류의 권력들과 그 권력들이 의도적으로 생산해낸 편견들로 인해 깨끗함과 더러움이 뒤바뀌는 경우는 참으로 많았고, 지금도 여전히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구약성서의 레위기 15장19절부터 33절까지, 그리고 18장19절, 20장18절에는 여성의 생리 자체를 불결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인 것이지요. 하지만 구약을 믿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오랜 역사도 레위기에서 말하는 것처럼 여성의 생리를 불결한 것으로 보아왔다는 것입니다. 이는 종교적 권력을 가진 자들의 잘못된 생각이 하느님의 뜻으로 탈바꿈한 어리석음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민족, 어떤 문화의 역사를 보아도, 이와 비슷한 일들은 자연스럽게 있어왔습니다. 한반도의 역사를 살펴봐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양반이니, 상놈이니 하는 신분제도 역시 당시 권력집단이 기득권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지요. 신분상 힘을 가진 자들은 권력 유지를 위해서 힘없는 자들을 천하고 더러운 존재로 몰아가야만 했습니다. 낮은 신분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 스스로도 세월과 함께 자신들을 천한 존재로 받아들였던 어둡고 슬픈 역사입니다.

이러한 사회 구조는 오늘날에도 형태만 다를 뿐 과거와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힘을 가진 자들이 힘이 없는 이들을 눈 아래로 보려는 더러운 성향은 여전히 자연습럽니다.

 

더럽다는 말도, 깨끗하다는 말도 상대적일 수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는 마음에 따라 깨끗함과 더러움이 바뀔 수 있다는 말입니다.

차별을 만들고자 하는 이의 눈에 들어온 누군가가 더러운 것이 아니라, 차별을 만들고자 하는 그 마음이 더러운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식사 전 손을 닦는다는 것은 조그만 종지 하나 가져다 놓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잠시 담그었다가 마른 천으로 닦는 것을 뜻합니다. 즉, 바깥에서 손을 닦았던 안 닦았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지요. 이런 모순적 기준을 가지고 제자들을 비난하는 바리사이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하시며 야단을 치십니다.(마르코7,8)

 

분명히 깨끗하고 더러운 것은 존재합니다. 그리고 깨끗해지고 더럽혀진 것도 존재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어떤 대상이든지 그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 마음의 건강입니다.

건강한 마음만이 있는 그대로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더러운 것을 보고 더럽다고 하고 있는지, 깨끗한 것을 보고 깨끗하고 하는지를 말입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마음이 건강한지 그렇지 못한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중 하나는 선과 악, 깨끗함과 더러움의 식별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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