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0일 한 발작 뒤로 물러나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과 함께 지낸 적이 없다. 그분의 얼굴을 뵌 적도, 그분의 목소리도 들어 본 적도 없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다마스쿠스로 내려가던 길에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뿐이다(사도 9,1-18). 그런데도 그는 정말 담대하고 용감하게 그것도 이방인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어찌 보면 오만해 보일 정도로 그는 주님과 복음에 대해 확신에 차 있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알려지지 않으신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명예로 여깁니다. 남이 닦아 놓은 기초 위에 집을 짓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그에 관하여 전해들은 적 없는 자들이 보고, 그의 소문을 들어 본 적 없는 자들이 깨달으리라(로마 15, 20-21).’”
그러고 보면 나도 예수님을 뵌 적도 없지만 잘 하지는 못해도 나름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이렇게 살고 있고 늘 예수님께 송구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으로 산다. 마치 예수님과 함께 살고 그분의 유언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그분에게 큰 빚이라도 진 사람의 마음으로 산다. 많은 성인과 순교자들도 그분에게 채무자처럼 모든 것을 다 바쳤다. 목숨까지도 내 놓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들은 결코 맹목적이거나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사리분별, 이해득실, 수지타산 이 모든 것을 알고, 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는 천재적인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왜 그리고 어떻게 예수님께 빚을 진 사람처럼 되었을까?
믿음은 그런 것인 게 분명하다. 논리적 추론의 결과와 그것을 수용하려는 의지적인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뵌 적도 없는 분, 말씀을 들어 본 적도 없는 분을 이렇게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그분께 죄송하고 고마운 마음을 가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오늘도 이것저것 해야 할 일, 처리하고 결정해야 하는 일, 만나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모든 것을 시작하기 전에 좀 따져봐야 하겠다. 왜 그런 것들을 하는지. 그것들은 나에게 이익이 되는지. 아무리 세상이 복잡하고, 분주하고, 소란스러워도 단 5분만이라도 거기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이것저것 좀 잘 따져봐야겠다. 그 약은 집사처럼(루카 16,3-4) 어차피 잃어버리게 될 것들에 연연하지 말고 앞으로 가져야 할 것들, 내 영혼에 이득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따져봐야겠다.
Alberione, alberione, Catholic, catholic, content, contents, Contents, contents.pauline.or.kr, gospel, Gospel, FSP, fsp, pauline, Pauline, pauline contents, 카톨릭, 가톨릭, 교리, 교리교재, 꿈나무, 바오로가족, 바오로딸, 바오로딸 컨텐츠, 바오로딸 콘텐츠, 바오로딸컨텐츠, 바오로딸콘텐츠, 복자 야고보 알베리오네 신부, 성바오로딸, 성바오로딸수도회, 성 바오로딸 수도회, 성바오로딸 수도회, 주일학교, 콘텐츠 바오로딸, 콘텐츠바오로딸, 알베리오네, 야고보 알베리오네, 이종훈, 이종훈 신부,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이종훈 마가리오 신부님, 마카리오 신부님, 마가리오신부님, 마카리오신부님, 마가리오 신부님, 마가리오, 마카리오, rio, Rio, 구속주회,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cssr, 강론, 강론말씀, 복음강론, 강론 말씀, 복음묵상, 복음 묵상, 복음 강론, 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영원한기쁨, 영원한 기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