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한 길(주님 수난 성지 주일, 4월 9일)

이종훈

한 길(주님 수난 성지 주일, 4월 9일)

 

사람은 쌍둥이라도 완전히 똑같지 않습니다. 얼굴이 서로 다른 것처럼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이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진리는 하나입니다. 진리가 하나라면 옳음도 하나여야 할 것 같은데, 나의 옳음과 너의 옳음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갈등, 대립이 생기는 것이겠죠. 의로움과 정의의 기준이 개인적인 기호는 아니어야 하겠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시끄러워지고 복잡해질 것입니다. 의로움과 정의의 기준이 거의 인구만큼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양성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개성이 의로움과 정의의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찾는 진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삶 안에 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셨지만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서 세상에서 사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 하느님께 모든 권한을 위임받으셨으면서도 당신 마음대로 하신 것은 하나도 없고 언제나 하느님의 뜻만을 추구하셨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하느님 현존 안에서 생활하시고 일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볼 수 없는 하느님이 예수님에게는 보이고 당신의 귀에다 해 주시는 말씀을 듣고 계셨다는 뜻은 아닐 겁니다. 그런데도 당신이 언제나 하느님의 일을 하시고, 심지어 하느님과 하나라고(요한 10,30) 말씀하실 만큼 당신에게 하느님의 현존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웠습니다. 마치 눈으로 하느님을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그분을 느끼는 것처럼 하느님과 함께 사셨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하셨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언제나 당신과 함께 계심을 확신하실 수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한 8,29).”

 

예수님은 당신의 적들, 당신을 살해하려는 이들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마치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처럼, 숨어 기다리는 이리떼들이 있는 것도 모르고 풀을 뜯는 순한 양처럼 그분은 나귀를 타고 다른 순례자들과 함께 그곳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당신이 당하실 일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이 그러셨던 것은 오직 하나,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마태 21,6). 예수님에게 선하시고 참된 분은 오직 아버지 하느님 한 분뿐이셨습니다. 예수님에게 그분의 뜻은 선택과 조율이 아니라 순종의 대상이었습니다. 설령 그 길에 수난과 죽음이 놓여 있어도 예수님께는 그것이 가실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들었거나, 그분이 일으키신 기적을 목격했거나, 그분에 관한 소문을 들었던 이들은 환호하며 그분을 예루살렘으로 맞아들였을 겁니다. 때가 차서 이제 그분이 자기들에게 큰일을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한껏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그분은 권력자들의 손에 희생되셨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되리란 것을 알고 계셨지만, 당신의 제자들을 포함한 다른 이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사람들은 실망했지만, 그분은 만족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모든 것, 당신의 지상 사명이 모두 “다 이루어졌기(요한 19,30)” 때문입니다. 평화를 상징하는 나귀를 타고 어슬렁어슬렁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그려봅니다. 사람들의 큰 기대와는 달리 당신이 겪으셔야만 하는 수난과 죽음을 마음에 품고, 적들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용감한 전사처럼, 자신의 집에 들어가는 집주인처럼 당당하게 그러나 평화롭게 들어가십니다. 그런 그분의 마음과 모습을 상상하면 그분의 힘과 확신 그리고 그 당당함에 두려움마저 느껴집니다. 죽음도 그분을 막아설 수 없었으니 그분에게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진리이신 하느님, 그분을 너무나 사랑해서 죽음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그분에게는 기쁨과 평화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비틀거리지도, 머뭇거리거나 주저하지도 않으셨고 똑바로 반듯하게 걸어가셨습니다. 그분에게는 오류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의 길밖에 없는 이에게 길을 잘못 드는 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그분의 뒤를 따르는 우리도 흔들리지 않고, 비틀거리지 않고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평화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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