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8월 17일 저 너머에

이종훈

8월 17일 저 너머에

 

다른 수도자들이 종신서원을 하는 모습은 언제나 깊은 감동을 준다. 그 예식은 아주 단순하다. 주례자는 묻고 서원자는 답한다. 무엇을 청하느냐는 질문에 서원자는 평생 죽는 그날까지 이 수도회 안에서 자신의 삶을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에게 봉헌하기를 바란다고 답한다. 그 청원대로 사는 게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너무 잘 안다. 심지어 거짓맹세를 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 순간,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다른 존재에게 완전히 넘겨주겠다고 맹세하는 그 시간은 참으로 거룩하게 느낀다. 잠시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다.

 

혼인식은 시끌시끌해도 혼인 당사자와 부모들은 숙연해지고 때론 눈물을 훔치기도 하는 것도 그런 이유와 비슷할 것 같다. 혼인은 약속과 계약이고 사랑은 내어 줌이고 넘겨줌이니, 혼인은 완전히 자신을 너에게 넘겨주겠다는 약속이고 계약이다.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때 계약은 금이 가고 깨진다. 그래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 구원의 계약은 혼인으로 비유된다. 인간이 함부로 깰 수 없는 계약이다. 어느 누구 하나가 스스로 계약을 깨지 않는 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

 

오래 전 모르는 교우와 부부생활의 어려움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울먹이며 하시는 그분의 이야기만 듣자면 이혼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제로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분이 먼저 이혼에 관한 말을 꺼내 길래 생각을 들킨 것 같아 흠칫 놀랐는데, 이어서 성사혼을 했는데, 하느님이 맺어주셨는데 거기에는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다른 무엇이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깊고 신실한 신앙인가, 율법적이고 맹목적인 믿음인가? 처음 만난 그의 삶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질문은 분명 이 세상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키고 있어서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자신의 종신서원이 받아들여진 후 그 수녀들은 반주 없이 그들의 목소리만으로 조용히 노래했다. ‘당신의 언약대로 나를 받아주시고, 나의 소망이 어긋나지 않게 해주소서. 아멘.’ 그 소박하고 담백한 노래는 이 세상 너머에 계신 보이지 않는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인생을 걸만큼 그분의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완전한 신뢰의 표현이었다. 사람은 믿을만하지 못하다. 나빠서가 아니라 나약해서이다. 혼인은 인간과 맺은 하느님의 계약을 가리킨다. 그 계약은 영원하다, 인간이 깨지만 않는다면. 그 수녀들은 자신의 소망이 어긋나지 않기를 기도했지만 이제 나는 주님이 그 계약을 제발 잊지말아달라고 간청한다. 멋모르고 한 그 계약대로 살 자신이 없으니 기댈 것은 오직 하나 뿐, 나는 엉망이어도 당신은 하느님이시니까 당신이 하신 그 약속을 지키셔야 한다는 것뿐이다. 여기에 사는 우리에게는 불가능하지만 저기에 사는 그분에게는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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