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시기

[마신부의 성경강의] 마르코 복음 3장

마진우

마르코 복음 3장의 큰 주제의 흐름

오그라든 손과 오그라든 마음 –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예수님이 원하는 것 – 열두 사도의 선발 – 예수와 베엘제불 – 예수님의 참 가족

 

3장에서는 여전히 이어지는 치유사화, 하지만 그 내면의 본질은 영적인 것을 향해 있는 치유사화와 예수님을 찾는 이들을 현명하게 맞이하시는 모습, 그리고 배반자가 섞인 열두 사도의 선발, 사람들의 모함, 그리고 진정한 가족의 의미 등등 다양한 주제들이 산발적으로 나옵니다.

 

오그라든 손, 오그라든 마음

한 사람이 뭔가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다른 것들은 보이지 않게 마련입니다. 안식일

과 회당이라는 내용에 뭔가 동떨어진 느낌이 되어 버렸지만 분위기를 보다 현대적으로 바꾸어서 주일과 성당으로 그리고 그 가운데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바꾸어 보도록 합시다. 보다 직접적인 분위기가 보이는 듯 합니다.

 

안식일과 주일

먼저 우리에게 주일은 어떤 의미일까요? 많은 이들이 ‘주일의 의무’를 지켜야 한다며 주일을 나오고는 있지만 그 진정한 의미를 살아가고는 있는 것일까요? 혹은 주일은 쉬어야 한다며 막연히 몸을 놀릴 생각을 하거나 특별히 죄 짓는 것도 아닌데 하면서 친구들과 어울려 진탕 마실 생각을 하지는 않나요? 주일의 본연적인 의미는 ‘주님의 날’입니다. 올바르게 육신의 휴식을 취하면서 주님께 드려야 할 공경을 합당하게 드리는 날이지요. 지금 바리사이가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일의 의무’라는 그 외곽선만 넘지 않는 선에서 도리어 엇나간 모습을 더 많이 드러내고 있는 현실입니다.

 

마치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사랑은 아랑곳없이 ‘안식일 법’에 집중하여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악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도 ‘주일의 진정한 의미’는 아랑곳 없이 ‘주일의 의무’에만 집중하여 그 선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온갖 다른 일을 계획하는 것은 서로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주일은 오전에 성당에 잠깐 다녀온 뒤에 그 동안 못 논 걸 진탕 먹고 마시면서 노는 날이 아니라 그동안 세속의 일에 몰두해 있던 영과 육을 진정으로 쉬게 하고 주님의 뜻을 찾는 날입니다. 따라서 참된 의미의 안식을 취하거나 그 동안 마음쓰지 못했던 필요한 봉사를 할 수도 있는 날입니다. 물론 지나치게 봉사를 강요당하거나 소위 ‘성당일’ 만을 한다면 그 또한 바람직하지는 못한 모습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이

자 이런 거룩한 날에 도움을 청하러 사람이 왔습니다. 딱히 손이 오그라들었다고 해서 ‘병자’나 ‘거지’를 떠올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범위를 확대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주변을 조금만 진지하게 돌아본다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의외로 굉장히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지극히 가까우면서도 우리가 꾸준히 무시한 사람.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의미를 상징적인 표현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건 가장 필요한 부분, 일상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부분이 오그라들어 정상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바로 우리의 가족 안에 그런 이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손의 자리에 ‘마음’을 넣어봅시다. 그 사람은 바로 여러분의 부모이자 아내이고 여러분의 자녀들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안식일의 법’을 지킨다는 허울좋은 핑계로 그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마음이 오그라든 이

전혀 다른 의미의 마음이 오그라든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시기하고 증오하는 바리사이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의지로 마음을 굳힌 이들입니다. 우리 역시도 자주 빠지게 되는 오류 가운데 하나는 ‘정당한 미움’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할 때 아무런 이유가 없이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합당하고 정당한 미움의 이유가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미워한다’는 그 사실 자체가 하느님께는 바로 ‘부당함’이거늘 우리는 그 가장 큰 부당함을 무시하고 우리가 미워해야 하는 이유에 정당함을 부여하려 한다는 모순입니다. 바리사이의 완고한 마음에 예수님은 슬퍼하셨듯이 지금 우리의 정당한 미움에도 예수님은 여전히 슬퍼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모여든 군중

군중은 예수님을 밀쳐대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여전히 ‘병을 고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딜 가시든지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그분의 유일한 관심사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에게 전혀 다른 관심사로 찾아오는 이들 앞에서 참으로 현명한 방법으로 처신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배를 띄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를 이용해서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되 그들과 직접적인 대면은 피하는 참으로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면서 참으로 많은 ‘속적인 관심’을 지닌 이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들을 마냥 내치는 것도, 그리고 그들 안에 온전히 함께 머무는 것도 결코 좋은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극히 현명한 방법으로 그들과의 거리를 두면서 그들에게 하늘 나라를 전하는 방법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배’였습니다. 과연 우리 사목자들은 신자들과의 관계에서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하는 걸까요? 그건 각자가 찾아야 할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세속적 관심사로 당신의 일상을 ‘밀쳐대게’ 놓아두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서 온전히 ‘동떨어져서도’ 안 될 일입니다. 우리는 그들과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진탕 골프만 쳐대는 사제는 반성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혼자 거룩한 사제도 반성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맺는 우리의 친교를 사람들에게 전해줄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현명함이 필요합니다.

 

더러운 영들의 부르짖음

더러운 영들은 다른 모욕적인 언사를 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는 부르짖음을 연발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말을 하지 못하도록 엄하게 이르십니다. 결국 아무리 허울 좋은 말이라도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는 귀에 아름다운 듣기 좋은 말을 찾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우리의 높아져가는 자존심과 교만을 감지하는 영적인 감성도 키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달콤한 언사는 결국 우리의 성령에 따르는 진정한 사도적 활동을 가로막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입을 틀어막아야 합니다.

 

열두 사도의 선발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시고 그들을 부르신다는 것에서는 굉장히 ‘영적인 상징’이 읽혀집니다. 예수님은 평지에서 그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먼저 당신이 높은 곳에 올라가시고 그들이 따라 오도록 합니다. 우리가 흔히 논하는 ‘리더’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진정한 리더는 먼저 앞서서 나아가고 그리고 사람들이 뒤따라오도록 합니다. 흔히 사람들을 밀쳐대는 ‘보스’들이 있습니다. 자기는 전혀 꿈쩍도 하지 않은 채로 사람들의 등을 떠다미는 경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에서 배워야 합니다. 먼저 우리가 올라서고, 나서고, 궃은 일을 하고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 놓은 길에 사람들을 불러야 합니다.

 

제자들이 받은 권한

‘당신과 함께’, ‘파견’, ‘복음 선포’, ‘마귀 퇴치’ 이 4가지가 전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냈고, 파견을 받았으며, 복음을 선포할 줄 알았고, 마귀를 퇴치할 줄 알았습니다. 당신의 첫 사도들의 권한은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이 권한을 지니고 그대로 행사한다면 우리 역시도 예수님의 사도가 되는 셈입니다. 주님과 함께 머무르고, 주님의 파견을 받고,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님의 권능을 이루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마지막 항목인 ‘마귀 퇴치’는 광범위하게 이야기해서 세상에 깃든 악을 저지하는 모든 활동을 말합니다. 꼭 구마예식을 해야 마귀가 퇴치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실천할 때에 그 자리에는 그 어떤 마귀도 머물 수 없게 됩니다.

 

마지막 제자

예수님의 마지막 제자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아넘긴 유다였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예수님이 유다의 배신의 기질을 모르셨을까요? 우리는 이런 예수님에게서 ‘부족함’을 감싸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분명 유다의 마음을 알고 계셨지만 당신의 사랑으로 끊임없이 감싸 안을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는 수난 전날 저녁 마지막 만찬의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에게 끊임없는 경고를 주시면서 그가 마음을 돌이키기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그릇에 함께 손을 넣는 장면에 묘사됩니다. 결국 유다는 마음을 굳혀 버렸고 약속된 수난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만일 유다가 그 마지막 순간 마음을 바꾸었더라면 예수님의 사명은 몇 년 더 이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런 ‘만일에’라는 가정은 전혀 소용없는 짓입니다. 우리는 배신자의 대표격으로 ‘유다’라는 이름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마음을 바꿀 자유를 늘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용서받지 못하는 죄

질투에 사로잡힌 이들은 예수님의 영을 모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참으로 중요한 언급이 하나 등장합니다. 모든 죄와 신성 모독하는 발언도 용서를 받을 터인데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발언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죄만 피할 수 있다면 다른 것들은 기꺼이 용서를 받는다는 말이니 어찌보면 구원의 열쇠가 되기도 하는 말 같습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

단순하게 생각하도록 합시다. 성령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느님의 영입니다. 우리의 육은 정신의 명을 받들고 우리의 정신은 영의 명을 따릅니다. 오직 두 종류의 영이 있으니 하나는 성령이고 다른 하나는 더러운 영입니다. 우리의 영은 언제나 이 두 흐름에 내어맡겨지게 되어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선의’와 ‘악의’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악의’는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선의’를 ‘악의’로 비난한다면 그는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 성령의 작용인 ‘선의’는 누가 지니고 있을까요?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선의’는 성령의 작용으로 누구나 지닐 수 있습니다. 뻔히 악을 하는 자는 드러나지만 ‘선의’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누구도 함부로 심판할 수 없습니다. 그가 도대체 ‘선의’를 지녔는지 아닌지 우리로서는 ‘온전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뻔한 악행은 분명 ‘악의’의 발로입니다. 하지만 그런 뻔한 악행을 하는 자 앞에서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가 ‘선의’를 회복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쉽게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구원의 기회’가 열려 있습니다. 그들이 마음만 바꾼다면 그들의 악행은 하느님 앞에 잊혀질 것이고 그들은 ‘성령’을 따라 구원을 입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온갖 약점과 어두움에도 절대로 선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되고 이는 타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함부로 심판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이 땅에 살아 숨쉬는 그 누구에게도 마지막 희망을 건다면 우리는 최소한 ‘성령을 모독’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가족의 의미

같은 공간에 거주한다고 진정한 가족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정립하신 진정한 가족의 의미는 내면의 일치, 그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공유하는 모든 이들을 ‘가족’의 범주로 넣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에서 앞으로 하늘 나라에서 만나게 될 모든 이들의 모습을 한꺼번에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뜻’ 안에 일치해서 한 가족이 될 이들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가족으로 다시 하나가 될 것입니다.

 

 

 

글: 마진우 신부, 겸손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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