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케치북

 

[이종훈] 5월 20일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 (+ mp3)

5월 20일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

 

내가 믿는 하느님은 광야의 불타는 떨기나무 속에서 모세에게 ‘있는 나(탈출 3,14)’라고 당신을 소개하신 분이고, 예수님께서 아버지라고 부르셨고 우리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셨던 바로 그분이시다. 이 신앙을 나는 내 몸과 얼굴처럼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부모님께 물려받았다. 한때는 이게 못마땅해서 방황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참 고맙다. 하느님을 알고 믿게 된 것은 인생 최대의 행운이다.

 

하느님을 알게 된 건 행운이면서 동시에 도전이다. 부모님이 나에게 좋은 것만 주시려고 하셨겠지만 당신들도 모르게 나쁜 것도 주신 것처럼 물려주신 신앙도 그렇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들었지만 내게 새겨진 하느님의 모습은 일차적으로 무서운 심판자다. 이 모습은 죽는 날까지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말 잘 들어야 하고, 착해야 하고, 참아야 하고, 양보도 잘하는 착한 아이어야 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을 받는다. 물론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잘 아시겠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려고 해도 잘 안된다. 그렇다고 이런 나를 더러운 죄인이라고 심판한다면 왠지 억울하다. 잘 하지는 못하지만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는 아레오파고스 가운데에 서서 아테네 시민들에게 그들이 세운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제단에 비유하여 하느님을 알렸다. 그분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주인이라서 작은 신전 따위에서 살지 않으실뿐더러 완전하신 분이라서 우리들의 도움이나 찬미와 섬김이 필요 없으시다. 그분은 당신의 피조물들을 지배하지 않으시고 잘 자라도록 보살피시는 아버지 어머니 같은 분이시다. 내가 그 청중이었다면 여기까지는 잘 따라갔을 것이다. 그런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주장에는 그들처럼 피식 웃어버리거나 고개를 갸우뚱했을 것 같다.

 

나는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 그런데 그게 뭔지 아는 게 거의 없다. 아는 게 없으니 이해할 것도 없다. 그저 믿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역설적으로 부활의 기쁨은 공허한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죄인을 위한 것이었다는 교리에서는 마음이 움직인다. 우선은 내가 죄인임을 잘 알기 때문이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렇게 살라는 요구를 받는 것 같기 때문인 것 같다. 이것도 착한 아이 콤플렉스의 일종인가? 나는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을 응원하고 협조하고 그 일에 기꺼이 참여하고 싶다. 나쁜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서 뭔가 하고 싶지는 않다. 이런 마음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는데 마음 한 편이 불편하다. 부활은 믿을 수 있는데, 죄인을 위한 희생은 믿고 싶지 않다. 부활은 온전히 하느님의 영역이라서 나와는 상관이 없지만, 희생과 사랑 그리고 용서는 인간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이런 갈등이 생겨나는 것 같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나 보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2-13).” 희생, 사랑, 용서는 인간과 하느님을 이어주는 다리이고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사는 곳인가 보다.

 

주님, 주님의 영을 보내주시어 이 모든 걸 깨달아 주님을 더욱 가까이서 따르게 하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인류의 구세주를 안고 계십니다. 그분은 무섭기는커녕 오히려 제가 가서 안아 보호하고 안심시키고 위로해야 할 아이입니다. 어머니는 이렇게 저희들의 마음을 참 하느님의 참 사랑으로 이끌어주십니다. 주님께 받으신 은총을 제게도 나눠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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