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케치북

 

[이종훈] 5월 30일 예수님 손을 꼭 잡고 (+ mp3)

5월 30일 예수님 손을 꼭 잡고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요한 21,24).” 요한복음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증언이다. 여기서 이 제자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이고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냐고 조용히 여쭸던 그 제자이다(요한 21,20). 스승과 어른에게 깍듯이 예를 갖추어야 하는 우리 한국 문화에서는 스승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는 표현이 어색하고 마음에 잘 와닿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의미는 잘 알아듣는다. 예수님과 아주 친밀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의 기록과 증언을 참되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우리’라고 했다. 갑자기 ‘우리’라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우리가 누굴까? 그야 약 2천 년 전 그러니까 서기 100년경에 이 책을 읽으며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전해 받고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던 사람들이다. 초대교회 교우들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 예수님 가슴에 기댈 수 있을 만큼 예수님과 친밀했던 그 제자는 초대교회 교우들 하나하나의 신원과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아주 친밀한 사람들이고, 그 친밀함은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의 관계이다. 요한복음 1장 18절의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이라는 구절에서 ‘가장 가까운’으로 번역된 그리스 말을 직역하자면 ‘가슴에 기대어’란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아주 친한 사이인데, 그 친밀함은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 사이 친밀감, 아버지의 뜻을 위해 죽어도 좋을 만큼 친하고 사랑하는 관계이다.

 

그분 가슴에 기댈 수 있을 만큼 예수님과 친하다는 걸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문화적 한계일까? 기껏해야 아버지 손을 잡고 가는 어린이, 엄마의 손을 꼭 잡고 데이트하는 아들 정도밖에는 다른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다. 분명 그 이상일 텐데, 그러면 왠지 불경한 것 같아 못하겠다. 나는 아직 그 정도로 하느님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분명 그런 것들 이상이다. 외아들까지 내어주시는 사랑이지 않은가?

 

이 나이에도 기도 안에서 나는 늘 어린이고 예수님은 어른이다. 나는 그분의 말씀을 듣는다. 잘 듣는 부분도 있지만 듣기 싫고 따분한 이야기도 있다. 잘 따라가는 길도 있지만 투정을 부리며 안 가려고 오히려 예수님 손을 잡아당기는 길도 있다. 그래도 손은 놓지 않는다. 예수님은 당연히 내 손을 꼭 잡으시지만 내가 놓고 잡아 빼면 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분과 함께 가는 길은 판타지 영화에 나오는 황홀한 길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시밭길도 아니다. 그냥 평범한 비포장 시골길이다. 먼지도 나고 지루하지만 가끔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 땀을 식혀준다. 힘들면 그늘에 앉아 쉬기도 한다. 그리고 또 간다, 가던 그 길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라 자주 불안해지지만 그럴 때마다 예수님 얼굴을 올려다본다. 그분은 나보다 키가 크니까 저 멀리 내가 볼 수 없는 곳을 내다보고 계신다. 그러니 안심하고 또 간다.

 

예수님, 제 문화적 한계와 약한 믿음 때문에 아직 주님이 바라시는만큼 주님을 아주 친밀하게 느끼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주님 손을 놓지 않습니다. 제 신앙 이야기는 판타지 소설도 아니지만 비극도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이야기이고 주님이 쓰시는 구원 이야기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예수님은 아버지를 수없이 부르셨지만 저희는 어머니를 그렇게 부릅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 좀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거기서 우리에게 그러라고 하셨으니 마음 놓고 어머니를 부릅니다. 이 이야기를 다 마칠 때까지 항상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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