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신비여! (연중 21주일, 8월 27일)
며칠 전 한 지인에게 병자성사를 주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떠나 보내드릴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고 가족이 병자성사를 청했던 것입니다. 어르신 환자는 의식이 있으셨고 어눌하시지만 말씀도 하셨습니다. 어르신에게 고해성사를 해드리고 가족들도 원해서 고해성사를 해드리려고 하는데 마땅한 장소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가족 한 분이 환자가 보청기를 빼면 거의 못 들으시니 병실 구석에서 조용히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좀 어색했지만 달리 방도가 없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고해성사를 드리고 병자성사 예식을 하는데 그 어색했던 고해성사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환자에게 가족들이 고해성사 받는 모습을 보니 어떠셨냐고 여쭈었더니 감정이 북받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참 기쁘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그분이 하느님 품으로 떠나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인간은 초월적인 존재라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좋은 모습이 되기를 바라고, 반성하며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계속 더 좋아지고자 하는 노력의 끝은 하느님입니다. 한 마디로 하느님처럼 되는 것이 이 초월여정의 끝인 셈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초월의 욕구는 하느님의 초대이며, 부르심입니다. 며칠 전 그렇게 하느님께로 가신 그분은 사랑하는 가족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모습을 눈으로 목격했으니 생의 끝자락에서 무엇이 아쉬울 것이 있었겠습니까? 사실 의사 선생님은 2주 정도 시간이 있다고 하셨다고 했답니다. 그런데도 그분이 지상 삶의 끈을 예상보다 빨리 놓게 된 것은 체념과 포기가 아니라 기대와 신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기로 건너가는 것이 그리 쉬운 결정은 아니었겠지만, 가족들의 그 모습을 보며 희망이 더 커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그분은 자신의 초월여행을 마무리하셨습니다.
우리는 더 좋은 나, 더 멋진 내가 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 노력에는 한계가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그 초월여행을 완성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는 완성될 때까지 환생과 윤회를 통해서 그 초월여행이 계속 이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완성하지 못한 부분을 하느님께서 채워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분께서 초대하고 부르셔서 그 여행을 시작하게 하셨으니 나머지는 책임지시겠지요. 우리는 건너갈 수 없으나 그분은 건너오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우리에게로 건너 들어오셨다가 다시 건너가셔서 우리도 그분을 따라 건너갈 수 있게 됐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서 사실 때 친구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위대하고 신비로운 대답을 했습니다. 이리로 건너오신 하느님을 알아봤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가 명석하거나 신비로운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고백을 한 그에게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으로 가능했던 고백이었습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은 하느님의 은총이고 또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믿게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의 이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느님이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왜 하느님이 죽었어야 했는지, 그리고 부활은 어떤 것이며 우리는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는 지 잘 모릅니다. 비록 이런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을 수는 없지만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저 건너편에 있는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가 생의 모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초월 여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 믿음은 미지의 세계를 현실로 만듭니다. 그 믿음이 바위처럼 굳건하다면 그 세계도 더욱 현실적인 것이 되겠지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 그리고 순교자들이 그것을 증언했습니다. 우리는 믿는 대로 살기 때문에 믿음은 하늘나라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그 열쇠는 우리의 믿음 속에,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셈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보았으니 우리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내 안에 그리고 이웃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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