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10월 18일(성 루카) 신부님과 사제

이종훈

10월 18일(성 루카) 신부님과 사제

 

어렸을 때 사제관에 들어가면 신기한 것들이 많았다. 구수한 커피와 파이프 담배 냄새, 외제 비스킷과 초콜릿이 있었다. 책장에는 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는데, 그중에는 외국서적도 많았다. 어린 나의 눈에는 신세계였다. 신부님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하나도 특별하지 않다. 어쩌면 어렸을 때 그 경험으로 내 안에 신부님은 높고 특별한 사람으로 자리 잡았는지도 모르겠다. 사제가 받은 직무는 하나부터 열까지 봉사이다. 종처럼 요구하는 대로 응해야 한다. 그것은 사제직을 만드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지니셨던 모든 능력은 봉사와 섬김을 위한 것들이었고, 그럴 때에만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직무권한은 언제어디서나 유효하다. 성사의 효력은 그의 성덕과 무관하다는 뜻인데(사효성事效性 ex opere operato), 여기에는 양들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성사효력이 집전자의 성덕에 따른다면 합당하게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사제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리고 합당한 그는 아마 몇 년 안에 과로사할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 몸소 가시려는 고장에 제자들을 먼저 보내셨는데 마치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시는 것 같다고 하셨다(루카 10,3). 그들은 지극히 약한 자로서 강한 자들 한 가운데로 보내졌다. 지금도 주님은 제자들을 그렇게 보내신다. 주님만 믿으면 모든 위험을 피할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게 파견된 양들을 이리들에게 공격당해 상처입고 잡혀 먹히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사제들이 방어적이고 냉소적으로 변하고 처음부터 주어지지도 않은 신부님의 권위를 내세우는 것 같다. 그들도 똑같은 죄인들이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그들을 계속 부르시고 파견하신다. 반대와 비난 그리고 폭력에 상처 입어도 이리떼 속으로 당신의 양들을 보내신다. 그들은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야 한다(마태 10,16). 세상 권력자들이나 관리자들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유혹이 매일 들어도 매번 피해야 한다. 성공하지 못해도 괜찮다, 주님도 그러셨으니까. 사제들은 그들의 스승이요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지금 여기에 생생하게 되살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의 단 한 가지 기쁨은 자신이 주님을 닮아가고 있음일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아주 조금씩 부르심의 뜻을 알아갑니다. 그 작은 깨달음 속에서 은연중에 바라고 무의식 안에 숨어 있던 성공과 인정에 대한 욕구들이 진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래도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주님의 길은 여전히 반갑지 않습니다. 부족함을 넘어 부당함을 알면서도 끝까지 주님 뒤를 따르게 이끌어주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죽음의 고통을 받는 아드님을 위로해주셨듯이 주님의 길에서 머뭇거리고 우물쭈물할 때 더 깊은 신뢰와 희망을 보여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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