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1월 19일(연중 2주일) 십자가의 주님

이종훈

1월 19일(연중 2주일) 십자가의 주님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 노예생활을 탈출하는 공동체적인 큰 체험을 한 후에 하느님을 제대로 알기 시작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을 체험하면서 그분을 메시아 그리스도 하느님이라고 고백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몰랐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역사적인 사실이라서 고백이나 증언이 필요 없겠지만 그분의 부활은 증언과 고백을 요구받는 신앙의 진리이다.

 

공관복음들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의 삶과 활동, 십자가 수난과 죽음 그리고 마침내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점진적으로 증언하는데 반해,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그분이 그리스도 하느님이시라고 증언한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 세례자 요한 혹은 요한복음 저자는 그분에게서 도대체 무엇을 보았단 말인가? 그분 위에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을 내려와 앉은 것을 보았다(요한 1,32)는 게 무슨 뜻일까?

 

그 답은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는 그의 증언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하느님의 어린양, 파스카 어린양,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해방되던 날 밤 아무 이유 없이 희생되었던 한 살짜리 수컷 양(탈출 12,4-7). 그 어린양은 묵시록에서 다시 하늘에서 찬미와 영광을 받으시는 분으로 소개된다(묵시 5,6.12). 메시아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되신 분이다. 그렇게까지 세상을 사랑하시는 분이 우리 하느님이시다.

 

열한 사도와 바오로 사도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뵈었으니 믿는다고 증언하는데 나는 뭘 보고 믿나? 어렸을 때 장래희망에 신부라고 적었던 것 같다. 그랬더니 담임 선생님이 ‘너는 어떻게 믿느냐?’고 물으셨고 나는 ‘봤으니까요.’라고 대답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사실 어떻게 말해야할지 몰라 그런 말도 안 되는 대답으로 거짓증언을 했다. 선생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니 대화가 안 된다고 판단하셨겠지. 그런데 그 질문을 오늘 내가 나에게 새롭게 다시 던진다. ‘나는 어떻게, 뭘 보고 믿나?’

 

이론적인 신 존재 증명들은 알고 있다. 매우 복잡하다. 그런데 이론적인 증명이 다 그렇듯이 그것이 아무리 정교하고 완벽해도 내가 믿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건 힘이 없다. 세상이 요구하고 내가 바라는 증명은 그런 게 아니다. 내가 바라고 보고 싶은 것은 삶으로 그들의 믿음을 고백하고 살아계신 하느님을 증언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훌륭한 예수님의 제자들과 참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 삶의 공통점은 실패, 헌신, 희생인 것 같다. 실패 후에 주님을 만나 회심하고 길을 바꿔 헌신하고 희생하며 살고 주님처럼 죽었다. 그들은 거의 모두 도전 비난 고통을 겪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그들은 모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묵상하고 기도했을 것이다. 십자가 사건은 우연히 벌어진 억울한 사건이 아니라 그분의 전 생애를 상징하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리고 바로 그분이 그리스도 하느님이라고 선포한다. 성인들은 그 십자가 안에서 하느님을 보아서 주님을 따라 헌신하고 희생했을까? 아니면 헌신하고 희생하다보니 거기서 십자가의 주님을 만났을까? 이런 고민을 하는 이유는 사실 무겁고 귀찮아서 얼마 전에 내팽개친 십자가가 내 앞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대가 없는 선행과 희생에는 도전해볼 마음이 있지만 무관심 몰이해 비난을 각오한 헌신과 희생은 자신 없다. 아니 하기 싫다. 그래서 아무 것도 안 보이나 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서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아무 잘못이 없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한지 모르겠다.

 

주님, 주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죠? 이렇게 믿지 못하고 잘 따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안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못하는 건 줄 주님은 다 아십니다. 주님은 제게 실망하지도 빨리 일어나 짊어지라고 야단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냥 말없이 제 옆에 앉아 함께 계십니다, 다시 일어날 때까지.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왜 예수님이 어머니를 선물로 주셨는지 정말 잘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멘.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번호 제목 날짜
1793 [이종훈] 다해 12월 31일 주님의 천막(+MP3) 2021-12-31
1792 [이종훈] 다해 12월 30일 속량(贖良)된 백성(+MP3) 2021-12-30
1791 [이종훈] 다해 12월 29일 하느님 안에 머무르기(+MP3) 2021-12-29
1790 [이종훈] 다해 12월 28일(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하느님의 작은 사람들(+MP3) 2021-12-28
1789 [이종훈] 다해 12월 27일(사도 요한 축일) 신적인 친밀감(+MP3) 2021-12-28
1788 [이종훈] 다해 12월 26일(성가정 축일) 사랑수련(+MP3) 2021-12-26
1787 [이종훈] 다해 12월 25일(성탄새벽미사) 하느님 마음에 드는(+MP3) 2021-12-25
1786 [이종훈] 다해 12월 24일 하느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려면(+MP3) 2021-12-24
1785 [이종훈] 다해 12월 23일 엘리사벳(+MP3) 2021-12-23
1784 [이종훈] 다해 12월 22일 하느님의 세상으로(+MP3) 2021-12-22
1783 [이종훈] 다해 12월 21일 뜻밖의 선물(+MP3) 2021-12-21
1782 [이종훈] 다해 12월 20일 믿고 신뢰하게 하는 환경(+MP3) 2021-12-20
1781 [이종훈] 다해 12월 19일(대림 제4주일) 사제직을 위한 육체(+MP3) 2021-12-19
1780 [이종훈] 다해 12월 18일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MP3) 2021-12-18
1779 [이종훈] 다해 12월 17일 믿음으로 읽는 역사(+MP3) 2021-12-17
1778 [이종훈] 다해 12월16일 남는 것은 사랑 뿐(+MP3) 2021-12-16
1777 [이종훈] 나해 12월 15일 나의 행복 하느님의 뜻(+MP3) 2021-12-15
1776 [이종훈] 나해 12월 14일(십자가의 성 요한 기념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MP3) 2021-12-14
1775 [이종훈] 나해 12월 13일(성 루치아 기념일) 회심(+MP3) 2021-12-13
1774 [이종훈] 12월 12일(대림 제3주일 자선주일) 기쁨과 감사(+MP3) 2021-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