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4월 12일(부활대축일) 지금 성당은 빈 무덤?

이종훈

4월 12일(부활대축일) 지금 성당은 빈 무덤?

 

하느님이 한 여인의 몸에서 그것도 남자의 도움 없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도 그런데 죽임을 당하셨던 그분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더욱 이해할 수가 없다. 라자로처럼 그전 모습으로 소생하지 않으시고 각기 다른 모습으로 이곳저곳에서 나타나셨다는 보도는 정말 알아들을 수가 없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건너 자연 밖 초자연적인 세계의 일이다. 그러니 그걸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것은 이해와 설명이 아니라 믿음과 따름의 대상이다.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일이라 이해를 포기하는 게 아니다. 외아들을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신뢰하고 폭력과 죽음도 가로막지 못했던 진리와 영원을 향한 그분의 발걸음을 따라가겠다는 결심이다.

 

그런데 예수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처음으로 접한 사람은 마리아 막달레나(요한 20,1)와 다른 마리아(마태 28,1) 혹은 다른 여인들이었다(마르 16,1; 루카 24,10). 글로 쓰기조차 죄스럽지만 그 당시 여자는 소유물 중 하나로 여겨져 인격적으로 대우받지 못해 그들의 증언은 유효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셨다는 그 여인들의 황당한 증언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마르 16,11). 주님은 왜 이 엄청난 사실을 힘없는 이들을 시켜 전하게 하셨을까? 그러고 보니 예수님 탄생을 제일 먼저 알게 된 이들도 남의 집 집짐승들을 돌보며 들판에서 먹고 자며 들짐승처럼 사는 목동들이었다(루카 2,10). 하느님은 왜 이런 이들, 그들의 증언에 권위가 실릴 수 없는 이들을 선택하셨을까? 게다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들만 골라서 말이다. 사형선고를 내리면서 찜찜해하던 빌라도나, 그분을 없애는 게 하느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던 대사제와 수석 사제들, 그들이 바랐던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라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함부로 외치던 군중들 앞에 그전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나셨으면 믿네 안 믿네, 정신병이네 사기극이네 하는 혼란은 없었을 것 같은데 …. 하필이면 왜 그렇게 작은 이들을 선택하셨을까?

 

하느님은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이 그들 곁에서 태어나셨고, 그 여인들이 제일 먼저 그분을 찾아온 것이다. 우리 하느님은 가장 작은 이들 곁으로 들어오셨고, 그런 이들이 예수님을 제일 사랑했으며 제일 먼저 두 눈으로 하느님을 뵈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붙잡는다. 용서받아 예수님을 사랑했는지, 예수님을 사랑해서 용서받았는지(루카 7,47) 전후 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했다. 사제를 예수님 친구, 수녀를 성모님 동서뻘 정도로 생각하시는 태중 교우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단순하고 투박한 신앙이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고 이 세상 너머 하느님의 나라를 그리워하고 또 보게 해준다. 세상 먹물들은 그들을 맹목적이네 광신적이고 비이성적이네 하며 비난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께 모든 걸 내어드릴 준비가 되어 있다. 복음은 역시 작은 이들의 것이다.

 

미사와 전례가 멈추었다고 교회가 죽은 게 아니다. 성당문은 닫혔지만 성령님은 일하신다. 예수님의 일은 큰 돌도 죽음도 막을 수 없었다. 그분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일을 하고 계신다. 아니 인류의 조상이 낙원에서 쫓겨 난 그날부터 지금까지 죽 그 일을 하고 계신다. 믿었던 스승, 메시아 구세주의 죽음은 제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주님에게는 예정대로 때가 차서 벌어진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 같다. 제자들은 충격과 두려움에 싸여 공황상태로 숨어 있었지만 그분은 부활하시자마자 또다시 갈릴래아로 가셨다. 제자들을 불러 그곳으로 가라고 명하신 게 아니라 당신이 먼저 가시니 혹시 당신을 보고 싶다면 그리로 오라고 초대하셨다(마태 28,10). 미사 참례는 못하지만 주님을 따라 주님의 일에 협조하는 일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감염병 때문에 일상적인 미사와 고해성사가 잠시 중단됐다. 마음 아프고 불편하다. 하지만 일상적인 성사 생활을 언제 다시 하느냐가 그리 아우성칠 일일까? 단지 시간이 문제지 다시 잠시 후면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거다. 그렇게 예수님이 보고 싶다면 그분이 계신 곳, 그분이 여적 일하고 계신 곳으로 가면 되지 않나? 지금 성당은 성전 경비병들이 지키던 무덤, 빈 무덤이 아닐까? 천사들이 닫힌 성당 문 앞에서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 그러니 서둘러 그분의 제자들에게 가서 이렇게 일러라.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알리는 말이다(마태 28,6-7).”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걸 아닐까. 그 말은 성당이 무덤이 아니라 주님 부활의 증거란 뜻이고, 성당 앞에 붙어 있는 미사 중지 공지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일터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알림이 아닐까? 빈 무덤이 누구에게는 주님 부활의 증거이었지만 다른 누구에게는 더 큰 사기극의 시작이었다(마태 27,63-64). 그런 이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면 그들은 당신이 정말 갈릴래아의 그 예수가 맞는지 증명해보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처음부터 그분을 믿을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하느님을 사랑했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살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아는 걸 믿었고 자신을 사랑했다.

 

예수님, 미사 참례는 시간이 지나면 다시 할 수 있지만, 돌보지 않은 포도밭은 시간이 지나면 풀밭이 되고 남의 것이 됩니다. 원수에게 빼앗겼다면 되찾으려고 애쓰겠지만 돌보지 않고 내버려두면 소유권이 바뀐 줄도 모를 겁니다. 가장 작은 이들을 선택하시고 그들과 함께 사시고 그들 속에서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잘 보이지 않고 세상도 무관심한 작은 이들에게 더 마음을 두게 이끌어주소서. 아멘.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번호 제목 날짜
1693 [이종훈] 나해 9월 22일 선택(+MP3) 2021-09-22
1692 [이종훈] 나해 9월 21일(한가위) 저녁노을(+MP3) 2021-09-21
1691 [이종훈] 나해 9월 20일 시대를 앞서가는 신앙(+MP3) 2021-09-20
1690 [이종훈] 나해 9월 19일(연중 제25주일) 종(+MP3) 2021-09-19
1689 [이종훈] 나해 9월 18일 간직하여 인내로써 자라는 영원한 생명(+MP3) 2021-09-18
1688 [이종훈] 나해 9월 17일 돈을 따라다니지 마십시오.(+MP3) 2021-09-17
1687 [이종훈] 나해 9월 16일 만남(+MP3) 2021-09-16
1686 [이종훈] 나해 9월 15일(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고통을 품으신 분(+MP3) 2021-09-15
1685 [이종훈] 나해 9월 14일(성 십자가 현양 축일) 십자가 사랑(+MP3) 2021-09-14
1684 [이종훈] 나해 9월 13일 어떻게 믿는가?(+MP3) 2021-09-13
1683 [이종훈] 나해 9월 12일(연중 제24주일) 줄서기(+MP3) 2021-09-12
1682 [이종훈] 나해 9월 11일 바보들(+MP3) 2021-09-11
1681 [이종훈] 9월 10일 험담중지(+MP3) 2021-09-10
1680 [이종훈] 나해 9월 9일 하늘나라(+MP3) 2021-09-09
1679 [이종훈] 나해 9월 8일(성모님 탄생 축일)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MP3) 2021-09-08
1678 [이종훈] 나해 9월 7일 힘의 근원(+MP3) 2021-09-07
1677 [이종훈] 나해 9월 6일 착한 마음과 십자가의 길(+MP3) 2021-09-06
1676 [이종훈] 나해 9월 5일(연중 제23주일) 사리 분별 능력(+MP3) 2021-09-05
1675 [이종훈] 나해 9월 4일 몸(+MP3) 2021-09-04
1674 [이종훈] 나해 9월 3일 새 옷 갈아입기(+MP3) 2021-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