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고래(사순 5주일, 4월 2일)

이종훈

고래(사순 5주일, 4월 2일)

 

요한복음서의 전반부는 예수님이 일으키셨던 기적들을 전합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술로 만들어주셨던 기적으로 시작해서 38년 동안이나 치유받기를 기다리며 비참하게 살아 온 사람을 치유하셨고,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고, 날 때부터 눈이 먼 이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려내셨습니다.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들은 그 현상과 의미가 점점 커집니다. 그렇게 그 기적들의 내용이 강해지는 동시에 예수님과 그분을 반대하는 이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도 커집니다. 죽은 라자로를 되살려내는 놀라운 기적을 접한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요한 11,53).”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이 점점 커지는 이야기를 읽으며 그분을 따라 온 독자들은 라자로가 되살아난 이야기에서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다른 기적들은 혹시 몰라도 죽어 그 시신이 이미 부패되기 시작한 사람을 다시 살려내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라자로를 되살려낸 이야기는 예루살렘에서 당신이 몸소 겪으실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라자로 소생 이야기를 비롯한 모든 기적들은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려주고 또 독자들의 고백을 요구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 노예로 끌려가는 소위 바빌론 유배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치욕스러운 일을 당하면서 하느님의 백성인 자신들이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성찰했는데,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참회하며 뉘우치는 이스라엘을 하느님은 구원하셨습니다. 그들이 다시 고향땅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구원, 귀향을 약속하시며 그들을 위로하셨고 그들은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기적 같이 그들은 고향땅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들이 한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느님 홀로 불쌍한 당신 백성들을 위해서 이루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여러 기적을 일으키실 때도 그분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 없으셨습니다. 죽은 라자로 이야기에서 그것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미 죽은 지 나흘이 지난 시신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인을 그리워하고 슬퍼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기적들의 주체가 오롯이 예수님, 하느님 한 분이셨음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기적적인 귀향이야기는 어쩌면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하게 된 이야기와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당하고 야만적인 일본제국주의의 횡포에 여기저기에서 독립군과 의사들이 그들의 폭력과 불의에 저항하였습니다. 그런데 제 2차 세계대전을 끝낸 이유가 그분들의 활동 때문이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분들의 투신과 희생은 참으로 고귀하지만 그 영향력은 실질적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야심을 무너뜨릴 정도로 강력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독일과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을 선언하면서 일제강점기의 역사도 끝나게 되었습니다. 깨어 있는 우리 선조들은 불의와 폭력에 대항해 세상에 외치며, 온 몸을 던져 저항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해방을 맞아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울었고 하느님은 그 눈물을 닦아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기적적인 귀환을 당연히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신 일이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 민족의 광복 그리고 지난겨울부터 최근까지 일어난 일련의 기적 같은 일들이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신 일이라고 여기는 것이 과도한 신앙적인 해석일까요? 사실 당연한 것을 기적이라고 여겨야 하는 현실이 씁쓸하게 느껴지기 합니다. 반면에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과거의 악습과 왜곡된 역사해석의 틀이 그만큼 강력하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혼란을 겪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예견된 혼란은 많은 사람, 나아가 우리 모두가 과거의 악습에서 깨어나고 과감히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기 위해 필연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한 11,33.35). 사람들은 그분이 죽은 라자로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이야기 전체를 보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거기서 멀리 떨어져 계시던 예수님은 라자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이틀이나 그냥 거기에 머무르셨기 때문입니다(6절). 예수님의 눈물은 당신이 그렇게 많은 말씀을 하시고 기적들을 일으키셨는데도 아직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니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완고한 마음 또는 그들의 아둔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당신과 매우 가까웠던 친구들마저도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고, 계속 설득해서 간신히 마르타의 신앙고백을 들으셨지만 그 신앙이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들의 신앙 때문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라자로를 어두운 무덤에서 끌어내 밝은 세상으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구원은 우리 신앙의 대가나 우리 노력의 결과가 아닙니다.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결실입니다. 이스라엘의 귀향도, 우리 민족의 해방도, 라자로의 소생도 모두 하느님 혼자 하신 일입니다. 그 중에 우리가 한 일은 성찰하고 뉘우치고, 불의와 폭력에 대항하며 울부짖고, 불완전하나마 주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시간의 주인이시기에 인간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은 우주 만물을 빚어 만드셨으니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시간과 우주만물이 그분의 손에 있고, 모든 것은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는 광야에서 실패하고, 옛 노예생활을 그리워하며 하느님께 대들기도 했지만 마침내 그들은 약속된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좀처럼 바뀌지 않는 현실에 체념하지 않고 진실과 정의를 찾으며 진리를 따르려는 노력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하느님은 반드시 우리를 당신 나라로 이끌어 가실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닌 희망입니다. 커다란 고래가 3년 전에 가라앉은 세월호 희생자들을 바다 깊은 곳에서 꺼내 등에 실어 올 수는 없겠지만, 그 고래가 진실을 밝힐 수 있고 정의를 이룰 수 있는 희망을 끌어 올려 주었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단순한 사고였다면 다시는 그런 아픔과 고통을 주지 않게 하고, 또 그것이 음모였다면 다시는 그런 흉측한 일을 생각조차 할 수 없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면 고래, 우리 하느님은 그 꿈을 꼭 이루어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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