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7월 21일 자유를 주는 믿음

이종훈

721일 자유를 주는 믿음

 

우리는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는다. 마치 죄에 빚을 진 사람처럼 그의 요구에 응하고, 죄의 노예처럼 그의 명령을 따른다. 그 순간은 자신의 행동이 최선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죄가 완성되고 나면 그제야 또 자신이 속았음을 알게 되고 후회, 저주로 괴로워한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자꾸, 매 번 그렇게 되고야 만다. 하느님을 섬기며 그분께 영과 진리 안에서 합당한 제사를 봉헌하며 거룩하고 아름답고 살고 싶지만, 그것은 그저 우리의 거룩한 바람뿐인가보다.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마치 이집트 땅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 같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그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시기를 원하신다. 죄의 노예는 올바로 하느님을 섬길 수 없기 때문에, 그 땅을 탈출해서 하느님의 땅으로 옮겨 가야 한다.

 

파라오가 순순히 모세의 요구에 응할 리가 없다. 하느님도 그것을 아신다. 모세와 아론을 통해 여러 가지 이적과 재앙을 내리지만 그는 좀처럼 이스라엘을 놓아주지 않는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나 보다.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 앞에서 모든 기적을 일으켰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파라오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자기 땅에서 내보내지 않았다(탈출 11,10).” 탈출기의 저자는 파라오의 완고함이 주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이라고 해석했다. 파라오가 마지막 재앙까지 겪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을까? 이해하기 어렵다.

 

죄는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끝내 이루고야만다. 죄의 유혹에 맞서 싸워 이긴 적이 없다. 백전백패다. 그래서 죄에 이기는 길은 오직 하나, 피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드셨다는 것은 바로 이런 우리의 현실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언제나 끝내 그 죄를 완성하고야마는 우리의 비참한 현실 말이다. 사실 세상은 하느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살해하고야 말았다. 하느님은 인간이 그러고야말 것임을 알고 계셨나보다. 파라오가 마지막 재앙을 겪어야 이스라엘을 놓아줄 것임을 아셨나보다. 우리가 죄를 완성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죄였음을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느님은 이집트의 신을 모조리 쳐내시고, 맏이들을 모두 죽이는 재앙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죽음이 그들을 그냥 넘어가 지나가게 하는 표시는 한 살짜리 수컷 양이나 염소의 피였다. 이스라엘은 그 음식을 통째로 구워서 남김없이 먹었다. 그들은 그렇게 죽음을 피했고, 노예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이 양이나 염소를 통째로 먹듯이, 우리도 매일 거행하는 성찬례에서 예수님을 영한다. 그로 인해서 죽음이 우리를 헤치지 못하고 우리는 자유인이 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 지 우리는 도무지 모른다. 단지 믿을 뿐이다. 우리를 노예로 부리는 죄에 맞서 싸워 이길 승산이 전혀 없음을 안다면, 그 작은 빵을 먹음으로 자유로워진다고 믿는 것이 훨씬 이롭다. 남은 것은 믿음을 더해달라고 청하는 일뿐이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