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새해 결심과 축복 (설)

이종훈

우리 한민족은 명절에 차례를 지내며 조상들의 삶을 기억하여 고마움을 표현하고, 그런 시간을 통해 가족들의 사랑과 유대를 새롭게 합니다. 특히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의미이며, 진리이고 생명이신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피로써 증언하고 전해 준 신앙의 선조들을 기억하고 깊은 고마움을 지녀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분들이 차례를 지내는 그 시간에 강림해서 그 음식들을 먹는다고 믿지 않고, 위패가 그분들 자신이라고 믿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나무에 명필이 글씨를 새겨 넣었다 해도 그것이 그분들의 고귀한 땀과 피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형식상으로는 그분들에게 바치는 제사이지만 사실은 우리 자신을 위한 제사이고 성대한 식사시간입니다. 그런 예식을 통해서 우리가 혼자 잘 나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의 노고와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상기합니다. 그런 기억들은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쳐주고, 그분들이 그랬듯이 우리도 후손들에게 나쁜 것들은 다 버리고 좋은 것들만 가르치고 물려주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합니다.

더불어 비록 요즘은 통신 매체들이 발달해서 옛날과는 환경이 사뭇 달라졌어도, 이런 시간에 멀리 떨어져 살았던 가족들이 모여 함께 시간을 보내며 우리가 한 핏줄 한 가족임을 되새깁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도 이승훈에게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윤지충이 어머니의 죽음에 신주를 불사르고 천주교식 제례를 지냈다가 처형당한 신해년(1791년)의 사건이 있었던 뒤로 허황되고 괴이하고 망령된 설이라 여기고 마음을 끊었다고 합니다. 이런 안타까운 일이 있었던 것은 그 당시 이미 교황청에서 제사를 허락했는데도, 그 소식이 잘 전해지지 못 한 탓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조상의 은덕도 모르는 종교는 참된 종교가 아닙니다. 멀게는 신앙의 선조들, 가깝게는 돌아가신 부모님들의 은덕을 기억하고 고마워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흠숭할 수 있겠으며, 보이는 형제들도 사랑하지 못하는데 어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1요한 4,20)? 제사나 차례는 미신이 아니라 잘 보존해나가야 할 우리 한민족의 미풍양속입니다.

 

신앙의 선조들, 돌아가신 부모님들의 마음은 감히 하느님의 마음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분들은 우리와 같이 약점을 지닌 연약한 죄인들이었지만, 자녀와 후손들이 바르고 착하게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하느님의 그것을 닮았다고 하겠습니다. 그분들도 우리처럼 똑같이 잘못을 저지르고 실수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만을 주고자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것들 안에는 나쁜 것들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자녀들에게 좋은 것만을 주고자 했던 그분들의 순수한 지향은 결코 부정될 수 없습니다.

차례가 끝난 후 음복을 하면서 부모님과 조상들의 이야기를 할 때, 그분들의 약점과 실수는 웃으면서 말하지만, 그분들의 헌신과 노력 앞에서는 뭉클해짐을 통해서 그분들의 진정성과 사랑을 확인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제가 외교관이 되기를, 어머니는 의사가 되기를 바라셨지만 저는 수도 사제가 됐습니다. 외교관도 의사도 아니지만, 이제는 모든 민족과 언어와 문화를 넘어서는 세상 안에서 살고, 병들고 지친 영혼들을 위로하며 살아가게 됐으니 두 분의 꿈을 더 잘 이루어드린 셈이 됐습니다. 그분들이 제게 보여주신 헌신과 사랑을 기억할 때마다 뭉클하고 살아계실 적 마음 아프게 해드린 많은 시간을 기억하며 한없이 죄송한 마음과 동시에 깊은 고마움이 생겨납니다.

그분들도 역시 다른 세상 사람들처럼 제가 안정된 직업을 갖고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라고 여기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지금은 그것보다는 바르고 착하게 좋은 일을 많이 하면서 사는 것이 참으로 잘 사는 길이라고 말씀하실 겁니다. 이런 확신은 그분들을 기억할 때 저의 마음 안에는 그분들의 인간적인 약점은 없고 오직 헌신과 사랑만이 남아 있음에서 생겨납니다.

삶의 끝에 남는 것은 선행, 진리에 대한 헌신 그리고 사랑뿐입니다. 한 마디로 짧은 인생살이에서 건질 것은 이것뿐이란 뜻입니다. 이런 자각은 어디에서 오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인생이 짧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남몰래 만들어질 때 제가 땅 깊은 곳에서 짜일 때 제 뼈대는 당신께 감추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직 태아일 때 당신 두 눈이 보셨고 이미 정해진 날 가운데 아직 하나도 시작하지 않았을 때 당신 책에 그 모든 것이 쓰였습니다(시편 139, 15-16).” “저희의 날수를 셀 줄 알도록 가르치소서. 저희가 슬기로운 마음을 얻으리이다(시편 90,12).” 이 두 시편의 고백은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는 그 순간부터 우리 육신 생명의 날 수는 정해졌음을 알려줍니다. 다시 말해 시작이 있었으니 끝이 있게 마련이고, 태어났으니 죽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깨달음은 결코 우리를 우울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평화와 활력이 생겨나게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는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인생의 마지막 날이 있다는 사실 뿐입니다.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40).”

 

그 날을 두려워하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남은 시간 동안 마지막에 남을 것을 많이 그리고 크게 만들어가야 합니다. 많은 선행과 큰 사랑을 베풀며 산 이들은 후에 깊은 고마움과 큰 사람으로 후손들의 마음 안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보다는 주님께서 차려주시는 음식을 식탁에 앉아서 푸지게 먹는 행복한 그 날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그런 삶에 대한 훨씬 더 큰 동기가 됩니다(루카 12,35-38).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야고 4,13-15).”

서양 사람들은 새해를 시끌벅적하게 파티를 하면서 맞이하지만, 우리는 삼가고 조심하면서 맞이했습니다. 조상들의 은덕을 기억하는 마음에는 시끌벅적한 파티가 아니라 조용하고 경건한 의례가 어울립니다. 그렇게 한 해를 시작함은 주어진 한 해 동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예시한다고 하겠습니다. 경건하고 거룩한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하는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시고, 여러분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여러분에게 평화를 베풀어주시기를(민수 6,24-26)”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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