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가난한 마음(사순제3주일)

이종훈

오래 전 지인을 병문안하러 성모병원에 갔었습니다.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제 옆에는 허리가 굽으신 작은 할머니 한 분이 서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도 만나신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하셨습니다. 이유를 모르는 저는 그냥 무심히 서 있었는데, 그분과 동행하시던 자매님 한 분이 “신부님, 이 할머니는 사제복을 입은 신부님을 뵈면 하느님을 뵙는 것 같답니다. 그러니 그냥 그렇게 가만히 계시지 말고 할머니 손 한 번 잡아드리세요.” 하며 무심히 서 있는 저를 나무라시듯 말씀하셨습니다. 졸지에 야단맞은 저는 어색하게 그 할머니에게 인사하며 손을 잡아 드렸습니다. 신호가 바뀌어 건널목을 건너며 속으로 ‘나는 의인도 아니고 하느님은 당연히 아닌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야.’ 라고 투덜거리며 많은 사람 앞에서 꾸지람을 받은 것을 복수라도 하듯이 ‘이 할머니 신앙은 미성숙해.’ 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계신 분을 병문안 가게 되었습니다. 깊은 친분은 없었지만 항암치료를 받으시러 갈 때마다 그 날 아침미사 후에 저에게 안수 기도를 청했던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친구 분이 제가 와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가는 동안 얼굴만 아는 분이고 게다가 죽음을 준비하는 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무슨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병상에 누워 계신 분과 어색하게 인사했습니다. 그 친구 분이 환자에게 ‘신부님 오시니까 어때?’라고 묻자 ‘편안해지네.’ 하며 수줍게 대답하셨습니다. 그 대답을 들은 가족과 친구는 눈시울이 붉어지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 짧고 간단한 대답에 그들이 받은 감동은 지난 시간 동안 병간호하는 시간이 얼마나 고되고 마음 아픈 시간이었는지 알려 주었습니다. 그 순간 오래 전 사제복 입은 사제를 보면 하느님을 보는 것 같다던 할머니를 미성숙한(?) 신앙을 지닌 사람이라고 여겼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 때의 그 할머니나 이 환자분이은 사제를 보면 하느님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이렇게 쉽게 하느님을 보는 분들과 그런 분들의 신앙이 미성숙하다고 여기는 사제와 누가 더 하느님과 가까운 사람이겠습니까?

 

그분들은 볼 수 없는 하느님을 이 땅에서 보았습니다. 그분들의 공통점은 가난함이었습니다. 그 할머니와 병의 고통을 겪으며 죽음을 준비하는 두 분은 그 자체로 가난했습니다. 그 가난한 마음은 하느님을 보았고, 그분들은 잠시나마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느님을 직접 만났던 모세는 한 때 이집트 왕국의 왕자였지만, 이집트를 도망쳐 빠져나와 양치는 목동이 되었습니다. 그는 부자였지만,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를 부르셨고, 그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하느님은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당신의 백성을 불러내시기 위해서 그를 다시 그곳으로 보내십니다. 죽음을 피해 도망쳐 온 그곳으로 다시 보내시는 그 명령은 비록 하느님의 명이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이름을 여쭙니다. 단지 그것이 알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당신을 믿어도 좋은지, 당신은 나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는 지 묻는 것이겠습니다. 그의 질문에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아주 쉬우면서도 아주 어려운 이름입니다. ‘있음’이 하느님의 이름이며 또한 본질 중의 하나라는 뜻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이름치고는 너무 단순합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분이 단 한순간이라도 없어졌다면 그분은 ‘있음’이라고 불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있음’입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잠시 있다가 모두 없어지지만 그분은 언제나 ‘있음’입니다. 그분은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하느님의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삽니다. 두 분은 잠시나마 영원하신 하느님을 보았으니 그분들은 영원을 본 셈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그 환자분은 여전히 병의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 속에 지내실 것이고, 그 할머니는 아마 돌아가셨겠지요. 우리가 하느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그분의 현존을 느끼기는 바라고, 그분을 더 알고 싶어 한다고 해서 우리를 고통스럽고 마음 아프게 하는 세상의 현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지나가고 사라집니다. 시간이 지나면 없어집니다. 우리도 얼마 있다가 이 세상에서 사라집니다. 하느님의 현존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그 안에 머무르려 하는 이는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삽니다. 그분의 현존은 그 안에 머무르는 이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십니다. 거칠고 폭력적이며 어리석은 세상 한가운데로 그들을 보내십니다. 비록 세상과 맞서 이길 수 없고, 세상을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그렇게 파견된 이들은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삽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악한 일에 마음 아프고, 공동체에 실망하며, 악습을 고치지 못하는 자신에게 절망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이 우리가 하느님께로 돌아서야 하는 때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신의 가난을 고백하며 영원하신 하느님께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어 열매를 맺게 해주시듯 우리의 삶도 그렇게 해주실 것입니다(루카 13,8).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분께로 돌아섬이고, 우리의 삶을 잡아 흔드는 세상에서 넘어지지 않고 똑바로 서 있으려고 노력함입니다(1코린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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