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부활에 이르는 십자가의 길(주님 수난 성지 주일)

이종훈

얼마 전 가슴 아픈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3월 4일 예멘 남부 도시 아덴에서 한 테러 집단이 노인과 장애인을 위한 요양원에 난입해서 수녀님 4분을 포함해서 16명의 무고한 생명을 살해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무장 폭력 행위가 빈번한 곳이어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그곳을 빠져나갔지만, 살레시오회 사제들과 사랑의 선교회 수녀님들은 그곳에 남아서 노인들과 장애우들을 돌보면서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현지인들과 함께 계셨다고 합니다. 그분들은 당신들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계셨고 수도회 측에서도 철수할 것을 권고했지만, 오랜 논의 끝에 거기에 남아 있기로 결정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도회 측에서도 그들의 결정을 존중하고 받아들였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그분들에게 예고된 수난과 죽음이었기에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들의 결정은 수도자다웠고 그리스도인다웠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그분들이 그곳을 떠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돌보아줘야 할 노인들과 장애우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테러집단에게 그들은 아무 쓸모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수녀님들이 돌보아주지 않으면 즉시 버려지고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런 그들은 수녀님들에게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들은 가장 작은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마태 25,40). 그러니까 가장 작은이들인 노인과 장애우들을 버리고 떠남은 곧 예수님을 버림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수도자들이 예수님을 버린다면 수도자가 아니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아닙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가장 작은이들을 외면한다면 예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는 아주 간단하지만 그런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고된 수난과 죽음이었습니다. 그분들은 그 길을 가셨습니다, 그분들의 스승이요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셨던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그런데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고되어 있는 일입니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러니 죽음은 우리의 관심사가 될 수 없습니다. 주어진 시간까지 어떻게 사느냐가 우리의 과제입니다. 수녀님과 수사님들은 가장 작은이들을 죽기까지 사랑하셔서 그들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목숨을 다하여 섬기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분들이 당한 일들을 생각하면 종교적 열심을 가장한 폭력에 분노하게 되고, 너무 속상해서 슬퍼집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선택과 결정은 그 죽음이 끝이 아님을 증언하기에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고 그리스도인들과 수도자들의 신원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그분들은 죽음을 넘어선 다른 세상, 하느님의 세상이 있음을 증언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스승의 고지식함에 유다는 그분을 배반했고, 그로 인해 십자가 위해서 처형당하신 모습을 보고 다른 제자들은 도망갔었으며, 그런 분을 따랐던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랬던 그들도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더 열정적으로 주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 수녀님들과 수사님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앞에서 고민하고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부활하신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뒤를 따랐을 것입니다.

 

그 수도자들과 힘없는 노인과 장애우들을 살해한 사람들을 심판하고 벌주고 싶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분들도 그것을 바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그분들이 바라는 것은 그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평화롭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셨고, 그 위에서 희생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었습니다. 주님의 부활과 함께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인류가 탄생하였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폭력적으로 대했던 것처럼, 그분의 제자들에게 그렇게 대했고, 오늘도 그렇게 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길을 갑니다. 수도자들은 예수님 제자들 무리의 중심에 있고, 십자가의 길에서 가장 앞에 서서 주님 뒤를 따라갑니다. 수도자들의 삶이 이런 것이라고 하면 과연 성소자들이 있을까요? 우리 공동체가 알제리의 트라피스트 수사님들처럼, 예멘의 수녀님들과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면 그분들과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요? 두렵고 떨리지만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수도회에 입회하고자 하는 젊은이들도 여전히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수도자들을 박해로써가 아니라, 무관심과 특별히 대우하여 잘 대해줌으로써 수도자들이 예수님과 가까워지지 못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가장 작은이들을 눈에서 그리고 마음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수도자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선다면 그때는 수도자들을 박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박해가 심해지면 예수님과 가까워짐을 알게 되고 그들은 기뻐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이 없다면 이런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길을 갑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부활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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