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십자가의 길과 부활

이종훈

십자가의 길과 부활(부활대축일, 3월 27일)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종에 관한 기사가 났습니다. 여론조사결과 세계 최고 인기 지도자로 밝혀졌습니다.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에서는 국민의 93%가 교종을 좋아한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한국의 가톨릭 신자들을 조사했어도 아마 거의 같은 수치가 나왔을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이 기뻐할 일을 찾고 그 사람을 따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교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다른 것 같습니다. 그분을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그분이 좋아하실 일을 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의 영역이어서 사랑하면 그 사랑이 가리키고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교종이 말씀하시는 대로 구체적으로 자비를 실천하고, 가난하고 약한 이들 편에서 생각하고, 우리 중 가장 작은 이들을 돌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교종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닐 겁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면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하느님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병자를 치유해주셨고, 죄인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약한 이들의 편에 서 계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그분의 그런 행동은 기쁨, 위로, 희망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자신들도 버거운 율법준수만을 강조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행동은 반종교적이고, 반사회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계속 도전해왔고, 그분에게 올가미를 씌워 붙잡아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런 의도와 죽음의 음모를 모르셨을 리 없지만, 삶의 태도를 조금도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계속 그렇게 하시면 권력자들의 손에 희생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세 번씩이나 당신이 겪으실 수난과 죽음에 대해 제자들에게 예고하셨고, 그 날 과월절 식사가 그들과 나누는 마지막 식사가 될 것을 직감하시고 제자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그분에게 수난과 죽음은 이미 예고된 사건이었으며 그것은 곧 당신의 모든 삶의 종합이며 요약이었습니다. 그것은 수난과 죽음 자체가 아니라 당신의 신적인 생명을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내어줌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분은 예고하셨던 대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셨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당신의 어머니와 그분의 제자들 그리고 그분에게 은혜를 입어 그분께 희망을 걸었던 모든 이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눈으로 직접 보았으면서도 믿을 수 없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때는 축제 중이었기 때문에 그 충격은 훨씬 더 컸을 것이고,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볼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캄캄한 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한 여인이 그분을 모셨던 무덤이 비어 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 소식은 수난과 죽음과 함께 예고해주셨던 부활에 관한 시작이었습니다. 칠흑 같던 밤에 여린 촛불이 하나 켜진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남은 이 세상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러니 그 소식을 들은 제자들이 그 여인의 ‘그 이야기를 헛소리처럼 여겨 그 말을 믿지 않음은 당연했습니다(루카 24,11).’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무덤에 묻히셨다는 사실까지입니다.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거기부터는 온전히 하느님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에 사랑하셨고 당신을 따르던 이들에게만 나타나셨습니다. 세상 모든사람, 특히 당신을 반대하고 모질게 대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에게 당신의 건재하심을 당당하게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고 악으로 선을 가리려 했던 이들에게 마치 복수와 정의로운 심판이라도 하듯이, 또한 그분을 믿고 따랐던 이들이 받았던 고통과 모욕을 보상이라도 받듯이 세상이 바라는 대로 그분은 그렇게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묻습니다, 죽은 이가 어떻게 다시 살아나느냐고. 세상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인 우리조차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에 대해서 궁금해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알 수 있고 세상에 전할 수 있는 부분은 그분의 무덤 이야기까지입니다. 그 이상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사셨던 모습을 따라 살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부활의 말뜻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신 사람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따라 살았던 이들이 얻어 누리는 새로운 삶, 하느님의 생명,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영은 사라지지 않고, 육체가 살아있게 합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63).”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해서 그분을 따른다면 세상은 그 전에 그분에게 그랬던 것처럼 분명 십자가를 짊어지게 할 겁니다. 좋은 일을 하려 하고, 선한 양심을 따르려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방해꾼들이 있습니다. 반대, 비난, 조롱, 무관심 등으로 우리를 실망시키고 고통을 줄 겁니다. 세상이 그렇게 얹혀준 십자가의 무거움을 느낀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겁니다. 비록 그분의 현존을 느낄 수 없지만, 그분이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 즉,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는 그분의 예언과 명령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날 예수님의 무덤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듯이,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신지 알 수 없습니다. 그저 그분의 말씀을 믿을 따름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길은 곧장 하느님의 나라로 이어져 있습니다. 반면에 다른 이들에게 십자가는 그저 목과 손가락 그리고 벽면을 꾸미는 장식품에 불과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곧 부활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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