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다시 걷게 하는 그분의 목소리(부활 4주일)

이종훈

다시 걷게 하는 그분의 목소리(부활 4주일)

오래전 산속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사시는 분들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염소를 방목하였기 때문에 염소를 직접 볼 수는 없었습니다. 저녁이 되자, 그분이 염소 우리 근처에서 ‘메에~’라고 몇 차례 소리를 지르자 여기저기서 숲 속에서 염소들이 뛰어나왔습니다. 그리고 우리 문을 열어 그들을 하나둘씩 그리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염소들 이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염소들의 크기가 다름 말고는 염소들을 구분할 수 없었지만, 그분은 한 놈 한 놈의 이름, 성격, 족보까지 자세하게 설명해주셨습니다. 제게는 그것이 그저 하나의 염소 떼였지만, 그분에게는 마치 여러 명의 자식 같았습니다.

 

저도 그분이 했던 것처럼 ‘메에~’하고 말을 그들에게 걸어봤지만, 그들은 힐끗 저를 한 번 쳐다보고서는 이내 그들이 하던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들에게 저의 목소리는 숲 속에서 나는 여러 소리 중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반면에 그분의 목소리는 ‘이제 들어와라. 밥 먹으러 나가라. 조심해라.’ 등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말이었습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그들에게 제 목소리는 그냥 소리였지만, 그분의 목소리는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알아들었고, 그분이 지시하는 대로 그렇게 했습니다. 간혹 말을 잘 안 듣는 놈들이 야단맞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시면서 우리 각 개인에게 말씀을 건네십니다. 그분의 부르심에는 언제나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고, 그것은 우리가 잘사는 길입니다. 주인이 자신의 반려동물을 부를 때는 그들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경우가 많습니다.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는데 그것이 겉으로는 그들을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애정을 표현하면서 주인은 자신을 위로하고 애정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언제나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분이 심심해서, 혹은 위로나 애정이 필요해서 우리를 부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분은 완전하시고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이제는 오래전 이 땅에 계실 때처럼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우리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살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이제 우리는 그분의 말씀과 행적이 적혀 있는 책을 읽어야 하고, 그분을 따랐던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것들 안에 잠겨 있어야 합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양심을 양육시키고, 마음을 움직여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리게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하느님의 생명을 얻음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분이 제시하시는 길은 거의 언제나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그 길로 가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부 몇 사람만, 때로는 혼자서 그 길을 가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외롭고, 불안하고, 흥이 나지 않아 쉽게 지치기도 합니다. 바보가 되는 것 같고, 세상에서 천덕꾸러기가 된 것 같은 느낌도 받습니다. 그래서 그 길에 들어선 것을 후회하고, 포기하고, 다른 많은 사람이 가는 저 ‘널찍한 길, 넓은 문(마태 7,13)’으로 가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좋아하고 따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분을 반대하고 죽였고, 또 어떤 사람들은 무관심했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모두 나쁘고, 구원에서 제외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좋아하고 그분을 두고 열광했던 이들이 모두 좋고 구원받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모든 사람 중에 몇몇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가슴에 새기고 따르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십자가 위에서 억울하게 처형당하셨지만 사흘 만에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고, 한없이 기뻐했습니다. 그 이후부터 그들은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면 죽더라도 그분처럼 부활할 것임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민족 사람들도 그들의 증언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습니다(사도 13,48).” 그들의 근심과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요한 16,20). 그 기쁨은 예수님이 지니고 사셨던 그것으로 더 채울 것이 없는 충만한 기쁨이고(15,11), 그 누구도, 죽음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영원한 기쁨입니다(16,22). 우리 모두에게 그 충만한 기쁨, 영원한 기쁨을 주시려고 우리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십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분을 볼 수 없고, 그분의 목소리를 잘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분이 내 안에 그리고 저 너머에 살아 계실까? 그분 말씀대로 살면 기쁘고 행복할까? 정말 그럴까? 다른 많은 사람은 저리로 가는데, 나 혼자만 이리로 가도 될까?’하는 의심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확신이나 증명이 아니라, 신뢰이고 믿음입니다. 그분은 나의 이름을 아시고, 나를 바라보고 계시고, 나도 모르는 내 속내까지도 알고 계시며, 나를 사랑하셔서 ‘목자처럼 나를 돌보시고, 나를 생명의 샘으로 이끌고 계시다는(묵시 7,17)’ 믿음이며 그분께 대한 신뢰입니다. 우리의 믿음 안에는 언제나 불안과 의심이 함께 있습니다. 그것들이 더 커져 다리가 휘청거려 더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때, 우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으러 ‘문을 닫고 골방(마태 6,6)’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그분은 여린 바람결로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두려워하지 마라, 괜찮아.’라고 말씀하시고 위로해주실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일어나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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