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너와 나 사이에(부활제5주일)

이종훈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닙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 알 수 있는 표지입니다. 그 배지를 달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어떤 분이 “신부님도 그런 것 달고 다니세요?” 하며 핀잔 섞인 투로 말했습니다. 그런 투의 말에 언짢아서라기보다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반응들을 경험했다는 수도원 다른 형제들의 말은 듣고 안타까웠는데, 막상 직접 겪으니 뭐라고 대답하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던 것 같습니다. 친한 사람끼리는 정치와 종교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있지만, 이것은 정치나 종교와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속상하게도, 이것은 언제부터인지 정치적인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혼인을 하지 않으니 자녀를 그렇게 허망하게 잃은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음에 깊게 공감할 수 없어 부모들의 눈물을 보면서 죄책감마저 들었습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하며 세월호 희생자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할 때마다 2년 전 그때처럼 여전히 가슴이 아프고 미안함에 죄책감이 드는데, 자식을 키워 본 그분들이 그런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 놀라 정신이 멍해집니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바로 즉시 그 마음을 전해 받을 수 있을 수 테고, 그러면 그들도 그런 억지를 부리지 않고 유가족의 아픔을 나누어 자연스러워질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세월호 특별법의 자세한 내용과 그것의 한계에 대해서 보수와 진보 진영이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들어보면 여기가 옳은 것 같고, 저기서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이라면 그러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일을 정치적인 문제로 만들어버린 사람들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 아파함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이것이 동물의 본능인지 인간만이 지닌 능력인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분명 사랑의 시작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이에게 퍼져 나가는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은 자신이라는 울타리와 이기심과 자기중심적 사고의 올가미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비록 인간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는 동물이지만,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희생할 줄 아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희생은 사랑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쉽게 말하면 입장 바꿔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이 능력이 큰 사람은 무관한 이에게도 관심을 기울이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기꺼이 그의 이웃이 되어주기도(루카 10,29-37)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인간들이 자신의 죄로 인해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위해서 행동하십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모습과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모세를 부르셔서 그들을 해방시켜주셨습니다(탈출 2,24-25; 3,9-10). 그리고 더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모든 인간을 위해서 땅으로 직접 내려오셔서 우리 고통의 현실 안으로 기꺼이 들어오셨습니다. 죄인이 아닌 분이 죄인을 위해서, 인간은 갚을 수 없는 빚을 당신의 목숨을 대가로 탕감해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시고, 우리가 내는 신음소리를 들으십니다. 그것이 그분에게도 고통입니다. 공감은 사랑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가장 어려운 질문은 선한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과 의인들의 억울한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그에 대해 답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답들은 억지스러워 보인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보다는 그런 질문 앞에 고개를 숙이고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며 흘리는 눈물이 최선의 답일 것 같습니다. 정말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 질문에 대답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할 겁니다. 하느님은 세월호의 침몰을 막지 못하셨습니다. 안타까운 죽음과 힘없는 이들의 억울한 일들을 막지 못하셨습니다.

 

어느 날 이와 비슷한 일은 겪은 분이 사제인 저에게 하느님께서 왜 이런 시련을 저에게 주시는지 모르겠다고 따지듯 물어 오셨습니다. 그렇게 기도도 많이 하고 매일 매일 도와달라고 청했는데, 하느님은 왜 나를 이 고통의 수렁에서 구해주시지 않느냐고 묻고 아직도 자신의 기도가 부족한 것이냐고 하셨습니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이 겪은 억울한 일들과 그분의 성실함을 잘 아는 터이라, 제가 그분에게 드릴 수 있는 대답은 침묵뿐이었습니다. 눈은 감겼고 고개는 떨어졌고 입은 닫혔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조용히 한마디만 말씀 드렸습니다. “아마 하느님도 미안해하고 계실 겁니다.” 그러자 그분은 큰 울음을 터뜨리셨습니다. 그 뒤론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하느님은 평화스러운 하늘에서 복잡하고 죄스러운 세상 속에 사는 우리들을 내려다보시며 우리의 삶을 점검하시고 기록해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그분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묵시 21,3-4).” 어린 학생들의 안타까운 죽음마저도 정치적인 일로 뒤바꾸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과 야만적인 행동으로 유가족들을 모욕한 이 세상, 정말 떠나고 싶습니다. 뒤집을 수는 없으니, 버리고 다른 곳에 가서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느님은 이런 세상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이웃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을 뒤집지도, 당장 악인들을 끌어내서 벌을 주지도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분도 그런 일을 그렇게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하셨고 그전보다 더 철저히, 더 가까이, 모든 사람에게 살아계십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말씀하셨던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사랑은 입장 바꿔 생각함에서 시작됩니다. 사랑은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은 사랑 속에 살아계십니다. 내 안에, 너 안에 그리고 너와 나 사이에 더욱 생생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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