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부활 제6주일)

이종훈

얼마 전 끝난 인기 드라마 마지막 편에서 여자 주인공이 죽은 줄 알았던 남자 주인공을 만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 여주인공은 미련하리만치 올곧게 사는 남자 주인공 덕분에(?)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며 마침내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고 그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려했던 대로 결국 그 여주인공은 연인을 잃게 됩니다. 그 소식을 확인하고 서럽게, 애타게 우는 장면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움이란, 상실감이란, 사랑이란 저런 것이로구나 하고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런 만큼 죽은 줄만 알았던 그가 살아 있었음을 확인하는 그 순간의 감격과 또 지난 1년 동안 그리움에 괴로워했던 시간들의 억울함을 그 여배우가 얼마나 감동적으로 표현할지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전사 소식에 그토록 서럽고 고통스럽게 울었던 그녀의 슬픔이 재회의 기쁨과 감격으로 변하는 장면은 어색했습니다. 그것은 여배우의 연기력이 부족해서가 아닐 겁니다. 그녀가 그런 체험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배우들은 연기하는 사람들이니, 상대 배우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들을 떠올리며 그 감정과 상황을 연기하는 것일 겁니다. 상실, 그리움, 절망은 누구나 겪을 수 있지만, 죽은 줄 알았던 이와의 재회는 이 세상에서는 경험하기 매우 힘든 일이니 그 여배우도 그런 상황의 감격과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가끔 여러 매체를 통해서 사망 선고를 받은 사람이 잠시 후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접하곤 합니다. 그때는 감동보다는 호기심만 생겨납니다. 그런데 행방불명이나 남북분단으로 생사도 모른 체 살다가 다시 만나게 된 가족들의 이야기를 접할 때면 그들의 눈물에 시청자들도 감동하게 됩니다. 두 상황의 차이는 사랑입니다. 나와 관련이 없는 사람의 환생은 그저 한 신기한 사건에 불과하지만, 가족이나 연인과의 그런 재회는 새로운 세상의 창조입니다. 마치 한 여자가 엄마가 되고, 한 남자가 아빠가 되는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는 신비로운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의 부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모든 사람, 특히 당신을 고발하고 누명을 씌웠던 사람들, 믿지 않던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나타나셨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랬으면 부활에 대한 논쟁, 그분의 신성에 대한 논쟁과 의심은 없었을 텐데, 그분은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분은 당신이 일곱 마귀를 쫓아내 주셨던 여인과 극진히 사랑하셨던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에게 은혜를 입은 이들과 스승의 억울한 죽음을 막지 못하고 비겁하게 도망쳤던 일 때문에 죽고 싶을 정도로 그런 자신이 밉고 한없이 스승님께 죄송했던 이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한 마디로 사랑했던 이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니 성모님께 제일 먼저 당신이 살아계심을 알리셨음은 굳이 기록하지 않아도 됐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요한 14,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면 그분의 말씀대로 살고, 그러면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느님께 함께 사는 삶이란, 그분이 내 안으로 들어오시거나, 내가 그분의 세계로 들어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번역이고, 죄인을 위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보다 더 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런 분과 함께 산다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겠고,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견딜 수 있고, 실패하고 넘어졌어도 금방 다시 일어설 수 있으며, 이 세상을 떠날 때도 두렵지 않을 겁니다. 살면서 가장 필요하면서도 가장 구하기 어려운 것은 진정한 위로, 한결같은 용서, 지치지 않은 지지와 격려입니다. 친구와 연인은 물론이고 안타깝지만, 가족과 부모도 그것을 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죄인인 나를 위해서 죽음마저 마다치 않는 저 바보 하느님이 나와 함께 살고 싶어 하신다고 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사셨고, 부활하신 그분은 오늘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 살기를 바라십니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듯이, 주님과도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분과 친하게 지낼 수도 있고, 반대로 그분을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처럼 대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와 친해지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의 아드님까지 희생시키셨던 그 무모함이 우리와 친해지시고자 하는 그분의 바람이 얼마나 큰지 알려줍니다. 내가 그분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말씀을 듣게 되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게 될 겁니다. 그러면 그분은 기뻐하실 것이고, 그분의 기쁨으로 나는 용서, 위로, 격려, 지지를 받으며, 구원에 대한 더 큰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내가 사랑하는 만큼 나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더 알게 되고 그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결국, 나의 사랑은 하느님 사랑이 흘러들어오는 문입니다. 사랑은 창조합니다. 부활은 새로운 세상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부활도, 새로운 세상도 없습니다. 새로운 세상은 하느님과 함께 사는 세상입니다. 가족과 대화할 때는 제삼자의 중계가 필요 없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사제나 수도자의 체험 이야기도, 성인들의 증언도 필요 없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그분에게서 직접 듣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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