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포스트잇 속의 하느님 (연중 10주일)

이종훈

포스트잇 속의 하느님 (연중 10주일)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보여주셨고, 들을 수 없는 그분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그분이 다스리는 나라, 하늘나라를 알려주시려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 인간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 되셔서 사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에 대해서 설명하실 때에, ‘하느님은 이런 분이시다.’라는 식의 설명보다는 우리들의 사는 이야기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게다가 말씀만이 아니라 예언서와 율법서 중 당신, 즉 메시아 그리스도에 관하여 적혀 있는 말씀들을 실제로 이루어내셨습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루카 7,22-23).” 다시 말해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세주,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신 것이고 그런 일들을 일으키신 분이 바로 그분이시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은 그런 일들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늘에 계셔서 볼 수 없는 하느님이 이 땅으로 내려오셔서 우리는 그분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하늘의 언어가 아니라, 이 땅의 언어로 그리고 우리들이 사는 이야기를 통해서 하느님과 하늘나라를 알려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중의 하나로서 우리의 기쁨과 슬픔을 나누시며 우리처럼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다 짊어지시고 사셨습니다. 우리는 지난 한 주 또 마음 아픈 사고 소식을 듣고 괴로워했습니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청년을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 사고가 그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의 잘못 때문에 벌어진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애통해했습니다. 그 사고현장 구의역을 찾아 작은 포스트잇 메모지에 추모의 글을 적어 붙이고 작은 물건들을 놓아두며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그 글들은 우리를 더 아프게 했고 더 슬프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은 추모의 공간, 통곡의 벽이 됐습니다. 그 눈물은 추모이자 위로이고, 공감이자 저항이며, 반성이자 결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의 폭력성에 대한 고발이고 반성이며 결심입니다. 예수님이 그 때처럼 우리와 함께 사셨다면 과부의 외아들을 다시 살려내셨던 것처럼(루카 7,13-15), 그 젊은이를 다시 살려내셨을 것 같습니다. 또 화장실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그 젊은 여자도 살려내셨을 것 같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우리가 이토록 안타까워하고 마음 아파하는데, 하느님이신 그분의 마음은 오죽하셨겠습니까?

 

색색의 메모지들이 벽에 빼곡하게 붙어 있습니다. 인쇄된 말끔한 글씨가 아니라 갖가지 글씨체로 적은 손글씨들입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마음들입니다. 바람에도 쉽게 떨어져 날아 갈 메모지지만 그것들이 마치 제사상의 제물인양, 영정사진인양, 유물인양 사람들은 감히 손을 대지 못합니다. 일부 사람들이 그런 시도를 했었지만 시민들은 그들을 저지했고, 이런 시민들의 마음에 회사도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습니다. 어떤 폭력도 쓰지 않았지만 사회는 보이지 않는 자신의 폭력성을 인정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다시 살아 돌아오지는 못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그 오래 전처럼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생활하고 계시지 않으니 그들을 살려달라고 청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회의 폭력성과 잔인한 무관심에 승리를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죽은 과부의 외아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루카 7,16).’”하고 말했습니다. 그분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최대의 적인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 자신도 부활하셨으니, 죽음은 더 이상 그분에게 그리고 그분과 함께 있는 이들에게 그 힘을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메시아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은 예전처럼 우리와 함께 사시지 않고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살려내지도 못하십니다. 그러나 수많은 작은 메모지들이 모여 이룬 반성과 눈물, 그리고 그것들이 이루어낸 일들을 두고 과부의 외아들의 소생을 목격했던 그 사람들처럼 우리도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생각일까요?

 

예수님은 우리의 삶으로 하느님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처럼 사셨습니다. 하느님은 하늘만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이 땅에 사십니다. 하느님을 이길 자는 없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폭력에 대해 비폭력으로 대항하셨습니다. 죽음도 쳐 이기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뉘우치고 통회하는 마음과 선한 지향과 결심 안에 그분은 오늘도 살아계십니다. 감히 그분에게 대항하지 못하는 것처럼, 작은이들의 진심을 담은 추모의 메모지를 감히 떼어버리겠다고 나서지 못합니다. 그 힘과 거룩함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파하고 미안해하고 슬퍼했을 따름입니다. 비폭력의 승리의 시작입니다. 유혹하는 자는 이제 또 다른 현장에서 더 교묘한 방식으로 우리를 괴롭힐 것입니다. 그러하더라도 그에 대한 우리의 저항은 이번과 똑같을 것입니다. 안타까워하고 아파하고 슬퍼할 것입니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그러면 숨겨진 그것의 추악함은 세상에 드러날 것이고, 상처받은 세상은 치유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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