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인 죄(연중 11주일)

이종훈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인 죄(연중 11주일)

 

하루를 시작하며 오늘은 죄 없는 날이 되기를 바라고 결심하지만, 밤에 되면 어김없이 어제처럼 허물로 누벼놓은 하루를 반성하며 우울해집니다. 게다가 똑같은 잘못과 죄를 반복해서 저지르는 자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때로는 괴로워 그런 자신이 저주스럽기도 합니다. 교리시간에 인간의 원죄에 대해 배울 때는 그것이 믿을 교리이니까 겉으로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신의 현실, 아무리 결심하고 노력해도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을 보면 그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죄를 피할 레야 피할 수 없는 가련한 운명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죄의 사슬을 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느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일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깊이 뉘우치고, 통회하고, 괴로워하고, 자책하고, 정개하며 굳게 결심하지만, 그런 상황이 되면 그런 통회와 결심이 무색하게 똑같이 실패합니다. 한 마디로 자신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도대체 왜 그토록 싫어하면서도 그 죄를 반복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게 하면 좋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 기분 좋고, 위로 받고, 높아지고, 안전하다고 여기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즉시 후회하고 괴로워하는 걸 보면 그것은 분명 착각입니다. 아무리 후회하고 괴로워해도 그 시간은 돌릴 수 없고, 그 과거를 지울 수 없습니다. 부정하고 싶지만, 그것은 분명히 자신이 저지른 일입니다. 자신이 그것에 동의했고, 그 의지에 따라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우리는 죄 없이 깨끗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지만, 그것은 상상 속에만 있고 지금 여기에는 초라한 죄인만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느님은 바로 이런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깨끗한 자신은 상상 속에만 있고 이 땅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원죄론 보다는 사실 이런 죄인을 사랑하셔서 외아들마저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 더 믿기 어려운 교리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이런 자신을 용서해주시기를 바라고, 그 바람대로 하느님은 언제나 용서하십니다. 하느님의 큰 사랑을 받았고 또한 그분께 충실했던 다윗도 정욕에 눈이 멀어, 자신의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 우리야를 죽게 하고 그의 아내를 부인으로 삼았습니다. 나탄 예언자가 그것을 고발하자 다윗이 그에게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자 나탄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임금님의 죄를 용서하셨으니 임금님께서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입니다(2사무 12,9-13).”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했고, 하느님은 용서하셨습니다. 다윗이 용서받기 위해 한 일은 죄의 인정과 고백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용서받기 위해 해야 할 일도 이것뿐입니다. 사실 우리는 시간을 되돌릴 수도, 과거의 흔적을 지울 수도 없습니다. 이웃에게 손해를 끼친 것을 갚을 수는 있지만, 그런 행동의 기억과 후회와 괴로움의 상처는 없앨 수 없습니다. 용서받는 것 말고는 괴로움과 후회스러움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후회와 자책은 죄를 씻는 하느님 자비의 물을 자신 안으로 들어오게 문을 여는 열쇠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열쇠는 통회와 뉘우침의 눈물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것에 대한 송구스러움입니다. 후회와 자책 안에는 교만이 숨어 있지만,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것에 대한 통회와 뉘우침의 눈물 안에는 오직 하느님께 대한 사랑만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 자비이기도 합니다. 모든 이가 그녀가 죄인인 줄 알고 있는 한 여인은 예수님을 뵈러 찾아왔지만, 감히 그분 앞에 서지도 못하고 그분 뒤쪽 발치에 서서 울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으면 그 눈물이 흘러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루카 7,38). 그런 그녀에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용서하셨음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녀의 눈물은 하느님께 대한 그녀의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는 그분을 믿지 않았을뿐더러, 죄인인 그녀를 자신들과 분리시켰습니다(7,39). 자신은 저런 죄인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열심히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나쁘지만, 그 죄는 자기 자신과 매우 가깝습니다. 그 죄는 자신의 알몸을 하느님께, 부끄럽고 아픈 상처를 의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없는 것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있는 것은 죄인뿐입니다. 하느님은 그 죄인을, 나를 사랑하십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혹은 그런 무리들과 함께 있으면서 자신이 ‘열심히’ 산다고 여기던 바리사이는 자신의 죄를 볼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열심히 살아 죄를 모르던 그 바리사이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을 볼 수 없었고, 이 땅 위에 오신 하느님을 보면서도 볼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7,48).”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뿐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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