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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훈] 보이지 않는 악에게 이기기(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날)

이종훈

보이지 않는 악에게 이기기(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날)

 

지난 달 말 귀를 의심하게 하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한 대학생이 취업에 대한 고통 때문에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했는데, 마침 퇴근하던 전남 곡성군청의 한 공무원과 부딪혀 둘 다 사망한 사건입니다. 그 공무원은 성실했던 분으로 어린 아들과 출산을 앞둔 아내가 있는 젊은 가장이었기에 더 안타까웠습니다. 세상은 투신자살한 그 대학생을 탓하겠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그 젊은이 또한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취업에 대한 스트레스와 미래에 대한 불안이 얼마나 컸으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겠습니까? 그가 고의적으로 그 공무원을 덮쳤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누구의 죄이고, 누구에게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야 하겠습니까?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세상을 어떻게 단죄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분명히 악한 현실을 목격했으니, 어디엔가 그 힘이 숨어 있음은 분명합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 공무원의 장례식장에서 유가족들이 무릎 꿇어 사죄하는 투신한 대학생의 유가족들을 일으켜 세우며 용서했다고 합니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큰 감동을 받고, 그 모습을 상상하며 안타깝지만 아름다웠습니다. 아무도, 아무 것도 단죄할 수 없는 악한 현실이 주는 고통과 아픔을 치유하는 방법은 용서뿐임을 다시 한 번 확신하게 됩니다. 악은 자신의 실체를 결코 드러내지 않고 복수심, 이기심, 마음의 상처, 두려움, 무지 등 그런 어두움 속에 숨어서 연약한 인간을 조정해 자신의 뜻을 이루려 합니다. 그것은 분열, 폭력, 적대감, 절망 등입니다. 매번 경험하듯 우리는 악의 세력에 맞서 싸워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맞서는 대신에 유혹을 피하고, 고통을 인내하며, 용서하여 그것을 이깁니다. 이것은 불의에 굴복함이 아닙니다. 불의한 세상을 만들려는 보이지 않는 악의 세력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죄에 대해서는 단호하셨지만, 죄인에게는 한없는 자비를 베푸셨음을 기억합니다. 피의자도 결국 피해자인 셈이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입어야 하는 연약한 인간입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하나뿐인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념논쟁과 갈등은 시대착오적인데도 여전히 사회분열의 도구로 이용됩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누구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노래합니다. 분열은 비구원의 표지이고, 하나 됨은 구원의 표지입니다. 남북대치상황으로 인한 경제적, 정신적인 비용지출이 매우 큽니다. 완전한 통일은 아니더라도 서로의 적대감과 불신만 없어도 그 비용을 더 좋은 곳에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통일은 원한다고 하면서 북측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종북세력과 빨갱이라는 말이 우리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통일은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에 불과합니다. 어쩌면 양측의 일부 권력자들은 남과 북의 이런 사회적, 심리적 생리를 적절하게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주변 국가들은 한반도의 평화를 원한다면서도 속내는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습니다. 이런 사정들을 고려하면 양측 권력자들과 주변 강대국의 힘으로는 결코 통일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남한 사람들은 북한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저의 부모님들 세대는 북한이 고향이이서 비록 남한 태생이지만 북한 사투리와 음식이 더 정겹습니다. 그러니 아직 이산가족들도 있는 우리가 북한 사람들을 미워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권력자들도, 우리 남한의 권력자들처럼 자신의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일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 안에 생긴 이 적대감과 불신은 누가 그리고 어떻게 만들어진 것입니까?

 

우리 연약함 속에 숨어 있는 악의 세력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그 대신에 악이 숨을 장소를 없애버려 그것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적대감, 이기심, 복수심, 과거의 아픈 기억, 불신, 무지 등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하고 화해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지닌 가장 위대한 능력이고 가장 하느님을 닮은 모습입니다. 오늘 당장 남과 북이 화해하고 통일을 이룰 수 없고, 권력자들과 정치가들에게는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계층, 성별, 세대 간의 차이와 갈등을 극복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습니다. 아무리 착하고 좋은 사람들끼리라도 함께 삶은 그 자체로 갈등과 스트레스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셨기에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처럼 제자들의 공동체도 낯선 사람들이 함께 지내는 데 어려움이 많았는지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21절)?”하고 반문합니다. 이는 용서의 횟수를 물은 것이라기보다는 공동체 삶의 어려움을 스승에게 호소하고, 자신에게 상처를 준 이에 대한 심판과 처벌을 청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런데, 주님은 ‘왜 그러느냐?’ 혹은 ‘누가 그랬느냐?’ 대신에, 끝까지 용서하라고 응답하셨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드린 공을 다시 베드로에게 돌려주신 것 같습니다. 우리 문제는 우리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악의 세력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계실 자리도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심판과 처벌밖에 모르는 세상에게 이런 용서와 화해의 삶은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용서받았고 앞으로도 용서받을 것을 약속받은 그리스도인들만이 이런 아름다운, 가장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 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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