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다원화된 세상 속의 믿음 (연중 13주일)

이종훈

다원화된 세상 속의 믿음 (연중 13주일)

 

유아세례를 받은 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사는 줄 알았습니다. 학교에 가서 다른 친구들을 만나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혼란스러웠습니다. 청년이 되어 더 많은 공부를 하면서, 교회의 교리가 허무맹랑한 주장처럼 여겨졌습니다. 자연과학을 공부했던 저의 머리와 마음 안에는 하느님과 교리가 머무를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결국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어 교회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복잡하고 끝없이 펼쳐진 우주 안에 하느님과 성인들이 살고 있는 나라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저의 반항과 방황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와 논거로 무신론에서 유신론으로 돌아서게 됐는지 아직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 때 ‘우주는 그렇게 복잡하고 끝을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이 계신거야’라고 저 자신에게 말해주면서 저의 아둔함과 어리석음을 꾸짖었습니다. 복잡하고 광활한 우주라서 하느님이 안 계셨다고 여겼는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은 계시다는 것이니 모순입니다. 그런데도, 그 때 눈물로 통회하고 회개하면서 다시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참 모를 일입니다.

 

신앙에 대한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수도자로서 살아가면서도 저의 신앙 안에 불신앙이 들어 있음을 봅니다.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달, 의학과 인문사회학의 발전으로 세상과 인간 자체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고, 통신의 발달로 세상 곳곳, 심지어 오지에서 벌어지는 일까지도 방 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천주교만 있고, 천주교만이 유일하고 참된 종교인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주장하기 어렵고, 어쩌면 그의 변화 또는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합니다. 다원화된 세상 속에서 유일신 신앙을 지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어떤 의미인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인간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사는 목적과 삶을 이해하는 근본 원리, 그리고 하루를 살아가는 그분의 양식은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사실 그분의 잉태와 탄생도 이미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분의 명오가 열리고 처음 갔던 예루살렘 성전은 전혀 새로운 세상이면서도 동시에 자기 집과 부모님 품보다도 더 안락했던 곳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린 예수님은 집도 부모님도 잊어버리고 거기에서 이틀이란 시간을 보냈습니다(루카 2,41-49). 그 이후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과 함께 살았지만, 매년 그곳을 순례하면서 그곳은 그분의 마음 안에서 미래의 자신의 집이 되어갔고, 더 나아가 당신의 참된 집은 그 성전이 아닌 하느님임을 알게 되었을 겁니다. 그 하느님은 바로 당신 자신이셨습니다.

 

그렇게 그분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당신 자신에게로 이르는 영적여행을 하셨고,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와 그분에게로 나아가는 영적여행을 합니다. 우리가 선택했지만, 교회는 그분이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분명 어떤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과 행동에 깊은 감동과 매력을 느껴 그분을 따라다녔고 그분처럼 살려고 했을 겁니다. 또 다른 이들은 그분께서 직접 “나를 따라라(루카 9,59).”하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선택했든, 그분이 부르셨든 이 여행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둘 사이의 미묘한 차이는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을 따르겠다고 한 이에게는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58절)”고 답하시면서 그 길이 녹녹치 않을 것임을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겠다고 하는 이의 바람과 기대는 당신의 그것들과 같지 않음을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반면에 당신의 부르심에 주저하는 이들에게는 가족관계도 뛰어 넘고, 철회하지 않을 선택이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60절, 62절). 이는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르기 위해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1열왕 19,21)’ 한 것처럼, 그 선택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분의 삶이 진정 고통과 슬픔만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면 사람들을 부르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분은 사랑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분을 따를 때 가족관계도 초월하고, 그 선택은 취소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는 그분의 요구는 가족과 세상과의 단절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계시입니다. 다시 말해 가족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세상 안에서 그러나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불교는 윤회를 말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직선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탄생과 죽음이 단 한 번씩뿐인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산다고 믿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나름 삶의 바람, 꿈, 지향을 지니고 살고, 그것이 참된 것이기를 바랍니다. 영화가 끝나야 그 감독의 의도와 메시지를 알 수 있듯, 그의 바람과 지향도 그가 죽은 후에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자연을 포함한 이웃을 사랑하고 살았던 어떤 사람의 죽음 앞에서 존경과 애정 그리고 그리움을 지니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의 종교가 참된 것이었는지는 그가 얼마나 이웃을 사랑했는지를 통해서 평가됩니다. 그런데 그의 관심은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이었을 것입니다. 이웃을 하느님으로 여기고 사랑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율법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두 계명으로 환원시켜 주셨고, 바오로 사도는 이를 이웃사랑으로 요약했습니다(갈라 5,14). 이웃사랑은 드러나고 하느님 사랑은 숨겨져 있을 뿐 둘은 결국 하나입니다. 이웃사랑 없는 하느님 사랑은 프란치스코 교종이 경고하듯 ‘영성 소비주의(『복음의 기쁨』 89항)’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지독한 이기주의, 개인주의 감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다원화된 세상 속에서 종교는 더 이상 세상을 이끌어갈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묻는 삶의 의미, 목적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 대답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이고, 사랑이며, 영원한 생명이라고 우리는 대답합니다. 예수님이 그토록 사랑하셨던 예루살렘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었습니다. 그분은 그것을 아셨지만, 그리로 들어가셨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계신 곳이고, 당신이 계셔야 할 곳이었습니다. 그 예루살렘은 새로운 나라, 하늘나라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완전한 사랑,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그곳은 저 하늘 높은 곳이 아니라 세상 안에, 사람들 사이에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그 믿음은 주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왜 이런 선물을 주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굳이 묻는다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답하겠습니다. 믿음이 없다면, 세상 안에, 사람들 사이에 하늘나라와 하느님이 계심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 믿음은 배타적이거나,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을 제외한 모든 것을 포용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믿음은 점점 단순해져야 합니다. 본래 단순한 것이 강하고 오래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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