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영원으로 불어 들어가는 바람 (연중 14주일)

이종훈

영원으로 불어 들어가는 바람 (연중 14주일)

 

며칠 전 숲 속에서 휴일을 보냈습니다. 근 10년 동안 강원도 산 속에 있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성당에서 성당지기를 했습니다. 그러다 몇 년 전 소임지를 옮겨 회색빛 서울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서울에 온 지 5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숲에 가고 싶습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랐으니 도시생활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데도 그런 것을 보면, 이것은 부적응이 아니라 그리움입니다. 그래서 휴일이 되면 대부분 숲에서 홀로 시간을 보냅니다. 등산이 아니라 숲 속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 매연, 수많은 기계음 등 인위적인 것들을 떠나 자연스러운 것들도 가득 찬 숲 속에서 쉽니다. 숲이 눈에 들어오면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하고, 새소리를 들으면 생활하면서 알게 모르게 생겼던 긴장감이 풀어집니다. 그렇게 숲길을 걷다가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면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은 채 그 소리와 바람에 온 몸과 마음을 맡깁니다. 그러면 모든 생각이 없어지고, 눈물도 납니다. 그 시간은 마치 엄마의 품에 안긴 아기처럼 완전히 안전하고, 젖을 빠는 아기처럼 더 채울 수 없이 풍족합니다. 아마도 하느님의 품이, 그리고 그분이 나와 우리를 다스리시면 그런 느낌일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 하느님보다는 어머니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유배 중인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귀향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너희가 그 위로의 품에서 젖을 빨아 배부르리라. 너희가 그 영광스러운 가슴에서 젖을 먹어 흡족해지리라. … … 너희는 젖을 빨고 팔에 안겨 다니며, 무릎 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이사 66,11-13).”

 

그렇게 편안한 시간을 보내며 걷던 중에, 문득 어렸을 때 학교에서 배웠던 숲과 나무들의 일생과 생태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침엽수, 활엽수, 관목, 교목 그리고 그것들의 상호작용 등 그 내용은 거의 잊어버렸지만, 이 숲은 매우 나이가 많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수백 년 된 지금의 이 숲에서 저는 고작 서너 시간 보내고 돌아가는 손님이었습니다. 그 생각은 우주의 시간과 공간으로 이어졌고, 그 우주 안에서 나라는 존재는 손님이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 그냥 스쳐가는 한 줄기 바람 같은 존재였습니다. 당연한 것인데 잊고 지냈습니다. 자신의 미소함과 비천함에 대한 자각은 이 우주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곤 합니다. 그 때도 그랬습니다. 그렇게 지극한 송구스러움과 고마움으로 행복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걸으려고 눈을 떴는데, 저만치 있던 통통한 산토끼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러자 이내 숲 속으로 들어 가버렸습니다. 쫓아가 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너는 좋겠다, 이런 곳에서 살아서.’라고 부러워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저의 생각이고 착각이었습니다. 숲은 그가 생활하는 곳입니다. 매일 먹이를 구하고, 상위 포식자의 위협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고 보면 나무들도 햇빛을 더 많이 혹은 더 적게 받으려고 서로 경쟁합니다. 곤충들은 살기 위해서 큰 나무를 통째로 쓰러트리기도 합니다. 심하게 표현하면 숲은 전쟁터입니다.

 

그렇게 그들에게는 치열한 삶의 터전이지만 나에게 숲은 휴식이기에 그런 숲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지만 나역시 집으로, 생활공간으로, ‘전쟁터’로 돌아가야 합니다. 해야 할 일들, 만나야 하는 사람들, 갈등, 다툼 등 복잡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 그곳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젖을 내어주며 포근하게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같은 분이 우리 하느님이시라고 말하지만, 그분의 말씀과 모범을 따라 사는 것은 전쟁 그 이상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숲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왔어도, 하느님을 만난 것 같은 행복감에 젖어 있었어도, 나의 삶의 자리는 하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과의 만남은 일종의 진통제나 마취제 같은 것일까요? 전쟁 같은 삶을 잠시 잊게 해주는 달콤한 낮잠과 같은 것일까요?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속에서 산다는 것은 숲 속에서 상위 포식자들의 위협을 피해 먹거리를 구하러 다니는 그 산토끼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랑, 용서, 평화, 인내, 희생, 헌신 등으로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며 살아가려는 그리스도인들은 폭력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의 순교역사가 그것을 대변해주기도 합니다. 사도 바오로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거기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다만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내가 가는 고을에서마다 일러 주셨습니다(사도 20, 22-23).”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들, 성인들의 삶을 보면 거의 모두가 이렇게 살다가 떠났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우울해집니다. 먹고 살기도 팍팍한 세상살이에 그리스도인이라는 멍에를 하나 더 짊어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엉뚱한 곳에서 태어나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살해 위협으로 갓난아이의 모습으로 이민생활을 하셔야 했습니다. 가난한 목수였는지, 전문직 종사자였는지 모르지만, 여하튼 그분도 먹고 살기 위해 땀 흘려 일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당신의 일을 하실 때는 그보다 훨씬 더 어렵게 사셨고 온갖 모욕과 수모도 당하셨으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렇게 그분은 우리보다 더 큰 수고를 겪어내며 사셨습니다. 당신 사명에 대한 내적 갈등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분도 우리처럼 속상하고 화도 나고 실망스러움에 잠을 설치기도 하셨을 겁니다. 아니라면 그분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분이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처럼 외적으로는 물론 내적으로도 수고하며 사셨다는 사실이 참으로 우리에게 큰 위안이 됩니다. 사도 바오로도 예수님때문에 삶을 송두리째 바꾸고, 그분 때문에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 때문에 받은 고문과 상처를 마치 지울 수 없는 노예의 인장(갈라 6,17)으로 여기며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느님의 것이라는 확실한 표징이었습니다. 세상살이는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거기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영겁의 시간 속에서, 끝을 알 수 없는 우주의 공간 안에서 스쳐가는 한 줄기 바람같이 살다 떠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겁의 시간과 무한한 우주의 주인이시고, 나를 미치도록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품으로 들어갑니다. 어떤 사람은 능력과 운이 맞아 성공하고 조금 편안하게 살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관심은 외적인 성공과 편안함이 아니라 내적인 만족과 평화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 그리고 성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에게는 십자가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 8,18).” 여기에서 성공과 편안함이 아니라, 하늘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음을 두고 기뻐해야 합니다(루카 10,20). 그런 이들의 마음은 이미 하느님께서 다스리는 곳입니다. 유혹, 도전, 실패, 걱정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우리는 초연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한 줄기 바람 같은 존재이지만, 그 바람은 불어 하느님께로 들어갈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여러분의 영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아멘(갈라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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