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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훈] 더 큰 사랑을 위하여(연중 15주일)

이종훈

더 큰 사랑을 위하여(연중 15주일)

 

교리서에 보면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느님을 향한 갈망이 깊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고, 그분은 인간을 당신의 품으로 이끌고 계십니다(교리서 27항). 이를 두고 예전 교리문답에서는 사람이 태어난 이유에 대해 ‘사람은 천주를 알아 공경하므로 영생을 얻어 무한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교리문답 1항)’라고 간결하고 명료하게 표현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심어주신 그 갈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분이 주신 계명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적이고 것이라서 그의 사랑이 참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대신에 이웃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스스로 정화시키고 심화시킵니다. 인간만이 속과 겉이 다른 거짓을 알고, 의도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거짓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보고 섬기고 사랑하면서 자신이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지 알 수 있고, 또 그 사랑을 계속해서 순수하게 만들어 나갑니다. 곧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웃 사랑뿐이고, 그것만이 자신이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 지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랑은 개념도 감정도 아닙니다. 사랑은 실천입니다. 사랑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입니다. 지식인들과 열심히 산다고 여겨지는 이들이 예수님께 도전해왔습니다. 그분이 참으로 하느님의 사람인지 알아내고자 했겠지요.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방법을 물었던 그 율법교사도(루카 10,25; 마태 22,35; 마르 12,28)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그것을 몰라서라기보다는 예수님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캐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은 그것을 잘 알고 있다고 여겼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런 것은 이미 율법에 다 쓰여 있으니, 오늘날 우리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그런 원론적인 대답은 그 때에도 웬만한 사람은 다 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 역시 문제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 같습니다.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려고’ 그런 질문을 했다니까 아마 그는 율법이 요구하는 자선을 실천하고 이웃에게도 따뜻하게 잘 대해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질문에 예수님은 ‘우선 너의 가족이고 가난한 사람이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며 너희 중에 가장 작은이들’이라고 대답하지 않으시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 말씀으로 그 답을 대신하셨습니다.

 

그 비유는 극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보고도 그냥 스쳐간 사제나 레위인들 즉, 종교인들을 비난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베네딕도 16세 전 교황님도 이에 대한 해설에서 그들이 그 현장에서 다 죽게 된 이에 대한 연민을 가지지 않는 차가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생각해보지도 못한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괴로우면서도 그냥 지나쳐갔을 것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들은 아마 설령 그가 부모일지라도 주검 가까이에 가서는 안 된다는(레위 21,11) 규정을 떠 올리며 자신의 행동을 억지로 합리화시켰을 것입니다. 사제는 자신을 정결하게 해야 한다고 새삼스럽게 생각했을 겁니다. 비난 받을 만하지만 솔직히 이해할 수 있는 마음과 행동이기도 합니다. 당황하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 그와 엮이게 되면 불편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테니까요. 사랑은 우리를 귀찮게 합니다. 움직이게 하고, 자신을 바꾸게 만들고, 재물과 시간과 마음을 내어 놓게 만듭니다. 전혀 강요하지 않는데도 알 수 없는 양심의 가책 같은 찔림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강요라면 저항하겠지만, 그렇지 않아서 괜히 부끄럽고 불편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그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기꺼이 자신의 일정을 바꾸고 그를 돌보아 줍니다. 그 내용에서 보듯이 그의 행동은 거창하거나 유별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2천 년이 지난 오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실천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여관 대신 병원 응급실이거나, 혹은 119를 불러 구급차에 동승한 정도 그리고 병원비가 조금 들어갈 수 있었겠네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보여 준 사랑의 행위 내용 그 자체는 거창하거나 심오한 어떤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고 공감하는 아주 일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사제나 레위인도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가 전해주는 이웃사랑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 씀씀이입니다. 그는 자신의 연민이 말하는 대로 움직였습니다. 그는 가던 길을 멈추었습니다. 그의 여행 일정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이 불편해질 것을 감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연민으로 그의 보호자, 후견인이 되어주기로 했습니다. 그는 그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 율법교사는 복지 대상에 대해서 물었지만, 예수님은 사랑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해주십니다. 사랑은 내어 줌입니다. 내어주는 이는 필연적으로 불편해지고 손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내적인 인간은 성숙하고 깊어집니다. 하느님과 가까워집니다. 하느님은 강요하지 않으시고 초대하십니다. 그런데도 그 초대가 강요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율법교사가 잘못 살고 있다고 나무라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랑을 더 확장시키라고 권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그의 이웃이 되어 주었냐고 예수님이 되물으시자, 율법교사는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37절).”라고 어렵게 대답했습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에둘러 대답했습니다. 그런 그의 대답에서 그 안에서 건강한 내적 갈등이 시작되었음을 느낍니다. 그냥 지어낸 이야기인데도 적대감을 갖고 지내던 사마리아 사람을 칭송하여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적대감은 컸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편적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원수까지 품을 수 있는 큰 사랑으로 초대하십니다. 우리에게는 분명 도전이 되는 주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사랑에 매력을 느끼고, 그것이 계속해서 양심을 자극하는 것을 보면 그것은 진정 하느님의 초대요, 구원의 길입니다.

 

그 율법교사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알고 있었고, 그렇게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도전했다가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새롭게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이웃을 더 크게 사랑하라는 무시할 수 없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랑은 거창하거나 심오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마음의 벽을 허물라는 주문이었습니다. 그 초대 때문에 그는 갈등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구원으로 향하는 더 큰 문을 열기 시작함이었습니다. 문화, 언어, 이념, 종교 따위가 하느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길을 예수님께서 열어주시고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서로 지니고 있는 사랑과 다른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도, 여러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처럼 주님께서 더욱 자라게 하시고 충만하게 하시며, 여러분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시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재림하실 때, 여러분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아멘.(1데살 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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