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손님(연중 16주일)

이종훈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손님(연중 16주일)

 

TV 노래 경연 프로그램에서 한 노장 가수가 아주 어린 가수들과 함께 마치 이야기를 주고받듯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노래에 심사 패널과 방청객 거의 모든 사람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는 저도 감동을 받았습니다. 방으로 돌아와 그 노래의 어떤 점이 저들에게 감동을 주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사제들의 강론에 감동을 받거나, 내가 강론으로 신자들에게 감동을 준 것이 도대체 언제였나 생각했습니다. 저 가수는 노래로 모든 사람을 감동시키는데, 기도와 묵상으로 나름 열심히 준비한 강론이 감동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고민했습니다. 그 가수들이 노래를 특출하게 잘 부른 것도, 노랫말이 시적으로 아름다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패널들이 나중에 한 말에서 감동의 결정적인 포인트를 알게 되었습니다. ‘엄마가 딸에게’란 그 노래의 제목이 보여주듯, 그 노래를 들으며 그들은 자신의 삶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미혼이든 기혼이든 그 노래는 곧 자기 삶의 한 부분을 과장도 미화도 없이 사실 그대로 담담하게 그들 자신 앞에 드러내놓게 했던 것입니다. 알면서도 못되게 굴었던 일들, 자신도 못하면서 강요했던 일들을 떠올리게 했고, 너무 가깝기에 쑥스러워서 하지 못했던 ‘사랑해, 미안해’라는 말을 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 노래는 보통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했고, 그것이 감동을 주었습니다. 감동은 마음의 움직임이고, 마음은 삶이 시작되는 곳이니, 그것은 곧 삶이 변할 수 있다는 좋은 신호이기도 합니다. 강론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삶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강론이 삶과 가깝지 않아서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이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었지 그분이 이야기꾼처럼 달변가였기 때문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분은 하늘나라와 구원이라는 초월적인 이야기를 그들 삶의 소재로써 쉽게 풀이해주셨습니다. 어느 성서학자는 그분의 비유 이야기들은 그분이 그 비유의 소재들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계셨음을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분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제처럼 성당이나 사무실에서만 계시지 않고, 다른 일반 사람들처럼 살기 위해 일하시고, 공생활 하실 때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시며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분이 특별히 눈썰미가 좋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세상살이에 관심과 애정을 지니셨고, 특별히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마태 11,28)’ 사람들을 대한 깊은 연민을 갖고 계셨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은 청중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을 겁니다. 그분은 철저히 세상 속으로 들어 와 사람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게다가 그분은 말씀하신 대로 사셨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은 더욱 힘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그들의 삶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겁니다. 그분은 다른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갖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7,29). 그 권위는 외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는 아버지의 사랑,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서 비롯합니다.

 

예수님 발치에서 그분의 그런 말씀을 듣느라 모든 것을 잊어버린 마리아는 손님맞이에 분주한 언니 마르타의 눈총도 의식할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가 집안일이나 세상일에는 도무지 관심 없고 단지 좋은 말씀만 듣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과 삶을 흔드는 예수님의 말씀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처지마저 잠시 잊어버리게 되었을 겁니다. 반면에 마르타는 자기 일에 더 깊이 빠져서 내면의 목소리와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주님의 말씀도 듣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 일하고 바쁩니다. 아니 바빠야 좋다고 하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왜 바쁜지, 왜 사는지 잊어버리다 보니 몸은 지쳐가고 마음은 불평으로 채워지는 것 같습니다. 마르타도 불평하고, 동생을 고발했습니다(루카 10,40). 화가 많이 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르타의 이름을 두 번씩이나 부르시면서 무엇인가에 꽁꽁 묶여 있고, 굳게 닫힌 그녀의 마음의 문을 아주 세게 두드리셨습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1-42절).”

 

꾸중을 듣는 언니를 본 마리아는 그제야 현실을 다시 보았을 것이고, 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잘못했다는 반성은 아니었을 겁니다. 오히려 언니를 안타깝게 여기게 되었을 겁니다. 우리 집,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려는 손님이신 예수님,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 그리고 그분이 기뻐하실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것에 동화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바로 그렇게 해서 손님 예수님을 기쁘게 했으니 자신도 모르게 손님 접대를 완전하게 했습니다. 반면 언니는 손님 접대를 위해 분주했는데도 손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셈이 됐습니다. 그 이후 마르타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나오지 않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마르타가 예수님의 꾸중을 듣고 자신의 방이나 부엌이나 창고에 들어가 불도 켜지 않은 채 그 짙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속상하고, 부끄럽고, 서운하고, 화도 나지만 부정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손님 예수님의 말씀에 그녀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손님 접대가 잘못되었음을 고통스럽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실 일은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어 받아들여 기꺼이 그분의 말씀대로 마음이 바뀌게 내버려두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이 바뀌면 삶이 바뀝니다. 자신이 왜 일하는지, 왜 바쁜지 알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잘 몰라서 누군가 그 마음을 자신에게 읽어주기를 바랍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깊숙이 숨어 있어 자신도 모르는 마음을 읽어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보다 나를 잘 아시고 사랑하시는 분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읽어주시고, 살포시 바꾸어 놓으실 수 있습니다. 어떤 특별한 능력과 특은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이런 기회는 주어져 있습니다. ‘과거의 모든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그 신비가 이제는 하느님의 성도들에게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그 신비는 여러분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이십니다(콜로 1,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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