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똑바로 걷기 위하여 (연중 17주일)

이종훈

똑바로 걷기 위하여 (연중 17주일)

 

수도생활을 시작하는 젊은이들과 더 깊은 영성생활을 원하는 분들에게 제일 처음 가르치는 것은 기도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인이 말했던 것처럼 기도는 많이 생각함이 아니라, 많이 사랑함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님과 친해지는 복음적 우정입니다. 자신의 모든 삶이 시작되는 마음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 친해지고, 그분에게 삶의 주도권을 넘겨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지만 예수님이 그것을 다스리시게 합니다. 자신의 의지를 예수님께 넘겨 드려 그분의 의지대로 산다면 그곳이 곧 하느님나라입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 하느님나라 시민으로 산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모으시고 바로 기도를 가르쳐주시지 않고 당신의 제자들과 한참을 지내신 뒤에, 그것도 제자들이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루카 11,1) 청해서 기도를 가르쳐주셨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지내고 있고,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는 제자들은 그분에게 교육받고, 그분이 가시자는 곳에 가고, 명하시는 대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은 다스리고 계셨습니다.

 

그래도 제자들이 원해서 기도를 가르쳐주셨는데, 그 기도가 우리가 매일 바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아주 단순한 기도입니다. 그 내용 중에 ‘자신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청하는 부분이 있으니 그것은 예수님이 바치셨던 기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신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이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셨으니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듣고 싶어 하시는 내용이기도 할 겁니다. 그런데 기도 내용 모두가 ‘-소서.’로 끝을 맺습니다. 다시 말해 모두가 청원이라는 뜻입니다. 감사의 기도부터 바치라고 배웠던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청하지만 말고 감사부터 하라고 가르친 것은 아마도 우리의 신앙이 현실 기복적으로 변질될까봐 그랬을 겁니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 대부분은 청원이고, 실은 그 청원에 간절한 마음이 온통 실려 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는 청하고 그분은 들어주시고, 우리는 자녀이고 그분은 아버지 어머니이시고, 우리는 구원해달라고 청하고 그분은 그런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기도를 가르쳐주신 후에 지속적으로 끈기 있게 청해야한다는 의미로 비유말씀을 하나 해주셨습니다(루카 11,5-8).비록 친구사이여도 한밤중에 찾아 간 친구에게 빵을 꾸어주지 않겠지만,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마지못해 귀찮고 시끄러워서 그에게 빵을 내어주는 그 친구는 하느님의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아버지 어머니 하느님께서 아주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어 당신께 청하는 자녀들을 귀찮게 여기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말씀드리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시는 분의 행동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귀찮고 시끄러워서 마지못해 필요한 것을 다 내주는 그 친구는 누구일까요? 어쩌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선하고 아름다운 일을 바라고 그런 자신을 꿈꾸면서도 엉뚱하게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행하곤 합니다. 마치 자신 안에 두 가지 인격이 존재하는 것 같은 분열된 모습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자신의 이런 고민을 말했습니다(로마 7,15-20). 선한 지향을 지닌 내가 자꾸 엉뚱한 짓을 하는 또 다른 나에게 부탁하는 모양새인 것 같습니다. 기도하고 결심하지만 실패합니다. 게다가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니 그런 자신이 얼마나 부끄럽고 한심하겠습니까? 그렇게 실망하지만, 또 다시 똑같은 기도와 결심을 합니다. 넘어짐이 아니고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지 않음이 실패이기 때문입니다. 끈질기게 졸라 대면 그도 어쩔 수 없이 필요한 만큼 다 내어 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아는 유일한 한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분은 하느님의 모든 권한을 넘겨받았고, 그분의 아드님이시니 그분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 분이 제자들에게, 기도하고 싶은 이들에게, 하느님과 가까워지고 싶은 이들에게 선언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 과연 하느님다운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내어줄 마음이 없다면 이렇게 선언할 수 없습니다. 이제 공은 우리에게로 넘어 온 셈입니다. 과연 무엇을 청하고 찾으며, 어느 문을 두드려야 할까요? 참으로 복잡하고 악의 유혹이 곳곳에, 아니 늘 자신과 함께 있는 이 세상에서 그분께 청할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잘 보고 흔들림 없이 목적지를 향해서 똑바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땅 속이 아니라 하느님 계시는 하늘나라입니다. 그곳은 여기 예수님께서 다스리는 마음 안에 있습니다. 비록 매일 자꾸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절망하지 않고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조카 롯을 살리기 위해 하느님과 흥정을 할 수 있을 만큼 하느님과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이 당신의 모든 것을 넘겨 줄 정도로 믿음직한 분이셨고, 그런 하느님을 사랑해서 목숨까지 내어 놓으셨던 분이십니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그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자신을 다스려달라고 청하기만 하면 그분은 1초도 지체치 않으시고 우리 온 마음을 차지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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