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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훈] 믿음과 충실 (연중 19주일)

이종훈

믿음과 충실 (연중 19주일)

 

우리는 언제나 크고 작은 것에 대해 결정해야 하고, 때로는 삶이 바뀌는 중대한 결단을 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결정, 결단은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며칠 동안 고민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합니다. 고민은 머리가 하지만, 결정은 마음이 합니다. 우리는 아는 대로 살지 않고 믿는 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본능적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결정하지만, 이어서 하느님의 뜻, 예수님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그 결정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 때부터 갈등이 시작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때부터는 머리가 아니라, 온전히 마음이 할 일입니다.

 

믿음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의 산물입니다. 머리가 제공해 준 자료들을 참고로 해서 마음은 선택합니다. 주님의 뜻이 언제나 자신의 희생만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이익과 주님의 가르침이 맞서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톨릭교회에 입교한 가장 큰 현실적인 이유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함이라고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의 실제 삶은 그 반대인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는 별 고민거리가 안 됐던 것들이 이제는 내적인 갈등을 만들고, 결정하고 풀어야 할 숙제가 되곤 합니다. 하느님께는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 인간에게 미래는 캄캄합니다. 전혀 알지 못합니다. 누구나 모든 것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가기를 바라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또 하느님의 뜻대로 하면 모든 것이 잘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단적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당하셨고, 수많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순교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뜻대로,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그렇게 전해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성공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잘사는 법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이 바라시는 완전한 인간이 되는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평화롭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 심지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주님의 가르침이 세속적인 성공과 안전, 그리고 힘에 의한 평화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믿어야 하는 이유는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알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장막으로 가려져 있던 미래를 보게 해줍니다. 곧 믿음은 미래를 만듭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아브라함은 살던 고향을 떠났습니다. 모세도 사막에서 하느님을 만나 그분의 사람이 되어 그 때부터 전혀 다르게 살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를 받은 후 집을 떠나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셨고, 그분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도 다르게 살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하느님 때문에 그들의 계획안에는 없었던 전혀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들 인생 안에 당신의 계획, 하느님의 나라를 만드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더 많은 사람들이 입교해올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에게는 주님 당신이 먼저 보여주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는 십자가가 주어질 것입니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그분께 가까이 다가서고자 하는 이에게는, 더 많은 도전과 반대, 분별하기 어렵고 심지어 하느님의 뜻처럼 보이는 유혹이 있을 겁니다. 이런 어려움과 혼란 속에서 참된 것, 즉 주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좋은 방법은 충실함입니다. 혼인 잔치에 가신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지만, 오늘을 어제처럼 또 내일도 오늘처럼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함입니다(루카 12,35-36). 때로는 그렇게 사는 자신이 고지식해보이고, 무능해보이고, 그런 충실함이 무의미해보이기까지 해도 그렇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는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고향을 향해 가고 있는 순례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같은 약속의 공동 상속자인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천막을 치고 머무르면서, 약속받은 땅인데도 남의 땅인 것처럼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가로서 튼튼한 기초를 갖추어 주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창세 11,9-10).” 어떤 사람은 금수저를 물고 나오고, 또 어떤 사람은 영리하고 튼튼해서, 그리고 어떤 사람은 운이 좋아 여기에서 편하고 안락하게 삽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삶의 전부는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미래는 여기가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완성됩니다. 모세는 약속된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느님나라 운동의 실패인 것처럼 보였을 겁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과 다른 성인들의 인생이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인들은 분명히 하늘나라에서 그들의 삶을 완성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믿었기에 충실했고, 그 충실함은 믿음을 더욱 굳게 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혼란, 유혹의 도전을 충실로 견디어 냈고, 그 충실함은 그들을 하느님 나라로 인도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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