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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훈] 식별기준인 하느님 사랑(연중 20주일)

이종훈

식별기준인 하느님 사랑(연중 20주일)

 

모임이 있어서 필리핀에 다녀왔습니다. 필리핀은 새 대통령의 너무 강력한 통치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보도된 대로 취임이후 지금까지 약 1,000여명의 사람들이 사살 또는 처형되었습니다. 하루 평균 6-8명씩 죽는 셈이라고 했습니다. 마약범죄는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를 병들게 하는 매우 나쁜 범죄라서 반드시 근절되어야 하겠지만, 그런 식의 처벌과 처형 방식은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필리핀 형제들도 수도회 이름으로 그런 그의 통치방식에 대해 반대하는 성명서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목적이 선하면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도 선해야 합니다. 목적이 선하다고 해서 악한 방식이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처형된 이들 중에는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도 있는데, 이런 사건들은 분노와 복수를 불러일으키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런 범죄와 그 범죄자들은 마땅한 벌과 교정을 받아야 하겠지만, 그 이전에 이런 일이 왜 발생하는 지 고민해봐야 하겠습니다. 죄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또한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도 없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이 죄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그러면 안 되는 지 잘 알면서도 그렇게 되는 것이 대부분 우리 죄의 현실입니다. 마약이 얼마나 나쁘고, 그것을 유통시키면 안 되는지 알면서도 돈을 쉽게 벌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겠죠. 게다가 마땅한 일자리도 없고, 그 일자리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으니 그렇게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범죄를 근절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것보다는 그런 범죄의 유혹에 빠질 필요 없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할 겁니다. 

 

그런데, 사망자 숫자보다 저를 더 놀라게 한 것은 교회의 일부 고위 성직자들은 그 새 대통령의 그런 통치 형태를 지지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그가 해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언제나 일치를 지향하는 교회 내에 분열이 생겼습니다. 그런 지지에 대해서는 결코 동의하지 않지만, 그런 마음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 안에도 그런 마음, 한 마디로 한 번에 모든 것을 싹 쓸어 새롭게 만들고 싶은 바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들은 그렇게 될 수 있겠지만, 사람에 관해서는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분은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그가 죄인인 것은 그가 악해서가 아니라 약해서 그리된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지극한 연민으로 그들을 보시고 끌어 안으셨습니다. 그것이 정치적으로 큰 약점이 됨을 아시면서도 그분 안에서 끌어 올라 넘쳐 흘러나오는 사랑을 감추지도 막지도 못하셨습니다. 이것을 잘 아는 성직자들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왔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복잡한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것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에 복종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산수 문제처럼 답이 정해져 있지도 않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으니 참 어렵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처형당하셨습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어리석고 신심이 없어서 그런 일을 저질렀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을 사랑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가장 단순한 방식은 하느님을 사랑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기뻐할 일만 하려고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만 생각하고 실천합니다. 그 범죄자들이 나쁜 범죄를 저지른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이 그만큼 나쁘다고, 아니 자신보다 나쁜 사람이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환경에 있으면, 그런 범죄의 유혹에 빠지게 되고 때로는 그렇게 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세상과 대통령 그리고 일부 성직자들은 그들을 나쁘다고 여겨 단죄할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연민의 마음으로 끌어안고 도와주셨을 겁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벌이 아니라, 교정과 일자리와 인내입니다. 

 

사실 이것은 단지 필리핀 교회의 일만은 아닙니다. 우리 한국교회 안에서도 이런 분열이 있습니다. 남북대치라는 특수 상황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는 것 같습니다. 세월호 사건을 기억하는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는 이들과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을 변호하고 그들과 함께 있으려는 이들을 종북세력이라고 비난하는 이들, 성직자 수도자들이 사회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것을 두고 부적절하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행위라고 비난한 이들이 그런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교회 조직을 만들러 오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려 주시러 오셨습니다. 절망하는 이들과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기적을 일으킬 수는 없지만, 그들 편에 서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런 행동이 교회의 분열을 가져온다고 해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분열은 반갑지 않지만, 이런 분열로 누가 참으로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드러나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행동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 마음에 하느님 사랑이면 그 행동은 예수님을 닮았을 것이고,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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