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가난한 마음에 내린 하느님 사랑 (연중 24주일)

이종훈

가난한 마음에 내린 하느님 사랑 (연중 24주일)

 

어느 날 성찬례(미사)를 거행하는 중 제병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하는 시간에 우연히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주례가 아니라 공동집전 중이어서 쉽게 눈에 뜨인 것 같습니다. 속으로 ‘저 사람은 이 중요한 시간에 왜 저러고 있을까?’하며 언짢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놀라며 정신을 차린 것 같았습니다. 영성체 전 거양된 성체를 바라볼 때 이런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그와 나 중에 누가 더 하느님을 깊게 만나는 것일까?’ 아침 이른 시간에 미사 참례를 하는 것을 보면 그는 억지로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시간에 졸았는데 이제 성체, 하느님의 몸을 모시려 하니 분명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마음이었을 겁니다. 반면에, 저는 성실하지 않은 이를 심판하며 여전히 불편한 마음이었습니다.

그 형제나 저나 조그만 빵 조각과 포도주만 보이고, 그 맛은 싱겁고 시큼합니다. 아무리 깊은 신심을 가졌다 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하느님은 저 너머에 계신 분이라서 우리는 그분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믿을 뿐입니다. 꾸벅꾸벅 졸았던 이나, 그렇지 않은 이나 똑같이 하느님과 하나가 됩니다. 하지만, 졸았던 그는 낮고 작아진 마음으로 그분을 모셔 들였겠지만, 그를 심판한 저는 불편한 마음으로 그랬습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가난해져 겸손했지만, 저는 화가 나서 교만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비참하게 돌아 온 둘째 아들이었고, 저는 그런 동생을 극진한 사랑으로 맞아주시는 아버지가 못 마땅해서 집밖에 서 있는 큰 아들이었습니다(루카 15, 11-31). 그는 그의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선물 받았습니다. 저는 하느님과 함께 있어도 여전히 평화롭지 못했습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31-32절)”고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었고,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불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하며, 무절제한 분 같아 보였습니다.

죄인을 향한 하느님의 관심과 사랑은 극진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길 잃은 한 마리 양과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의 비유 말씀으로 설명해주십니다. 아흔아홉 마리 양은 잊은 채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헤매는 목동 같습니다. 그러다가 속 썩이던 그 놈을 찾으면 너무 기뻐서 동네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아 자랑합니다. 없어진 은전 한 닢을 찾으려고 한 밤 중인데도 비싼 등불까지 켜 가며 온 집안을 발칵 다 뒤집어 샅샅이 뒤집어 찾아냅니다. 그러면 너무나 기뻐서 친구와 이웃까지 불러 그 기쁨을 나눕니다(루카 15,3-9). 사실 백 마리 중 한 마리를 잃어버렸는데 날까지 어두워지면 속상하지만 늑대가 물어갖겠거니 하며 남은 아흔아홉 마리를 더 잘 돌볼 겁니다. 설령 운 좋게 그 녀석을 찾았다 해도, 등짝을 한 때 딱 때리며 속상함을 표현했을 지도 모릅니다. 잃었던 양 한 마리 찾았다고, 잃었던 은전 한 닢 찾았다고 온 동네 사람과 친구들을 불러 모을 정도로 기뻐하지 않을 겁니다. 과장된 표현이고, 지나친 행동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러신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나라 전체가 기뻐한답니다(7.10절).

하느님은 정의롭지 못하고, 우유부단해 보입니다. 이집트 노예생활을 청산하게 해 주었지만, 그런 은혜를 입은 이스라엘은 금방 그 하느님을 잊었습니다. 그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그분의 명령(탈출 20,4)을 어기고, 불안한 나머지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던 것입니다(탈출 32, 1-6). 그런데 이를 두고 진노하신 하느님은 모세의 청원을 들으시고 화를 거두셨습니다(탈출 32,7-11.13-14). 그 때 모세는 백성을 야단치고 벌을 주겠다는 약속도,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도 않은 상태였습니다. 단지 당신의 약속과 사랑을 기억해달라고 청했을 뿐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을 예수님도 하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온 힘을 다해 하느님께 청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1티모 1,15).” 우리가 뉘우치고 용서를 빌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정의롭지 못하고, 불공평하고, 무절제하게 바보처럼 죄인을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은 세상에 없습니다. 오직 하늘에 있습니다. 사실 세상에 살며 가장 필요한 것은 바른 말과 강한 의지보다는 크고 한결같은 위로와 사랑입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도, 불성실하게 사는 이에게도 성체는 빵으로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송구스러운 마음에게 성체는 하느님의 사랑이지만, 열심히 살아 당당한 이에게는 그 시간도 또 하나의 메마른 의무이행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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