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연중 28주일, 10월 9일)

이종훈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연중 28주일, 10월 9일) 

 

예수님 시대에 나병환자들은 가족과는 물론이고 동네에서도 격리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들 근처에도 갈 수 없어서 멀찍이 떨어져서 이야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병이 나으면 사제에게 자신의 몸을 보이고 완치 판정을 받은 후에 비로소 가족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 예전처럼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만났던 나병환자 열 사람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루카 17,11-13). 그들은 율법에 따라 예수님 멀찍이 서서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외치며 치유의 은총을 청했습니다. 예수님도 율법에 따라 그들을 만지거나 침을 바르는 등 신체 접촉이나 눈 맞춤도 없이 그저 말씀만으로 그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사제에게 완치된 자신의 몸을 보이고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살라고 하셨습니다(루카 17,14). 예수님이 병자들을 치유해주실 때 그들과 눈을 맞추거나 손을 대시거나 침을 바르셨지만, 이 이야기나 백인대장의 종을 치유하셨던 이야기(루카 7,1-10)에서 보면 그런 행위 자체가 치유행위의 본질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보다는 그분의 말씀, 즉 그분의 의지와 마음이 진정한 치유 행위였던 것 같습니다. 나병환자들의 딱한 처지를 보고 당신 안에서 일었던 연민과 사랑의 마음이 곧 치유의 시작이고 마침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말씀대로 따라서 모두 치유를 받았습니다.

 

기도는 청원이고 바람입니다. 감사 또한 그것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성당과 집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의 청원과 바람을 아뢰고 또 감사의 기도를 바치기도 합니다. 치유, 건강, 사업, 평화, 문제해결 등 우리의 기도는 거의 대부분 이런 것들로 채워집니다. 이런 모습을 나무라고 기복적인 신앙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예수님도 당신이 만나셨던 사람들의 이런 처지를 나무라지 않으시고 그들이 바라는 대로 치유해주셨습니다. 그 때 그러셨던 것처럼 오늘도 우리의 이런 청원들을 모두 들어주시면 좋겠는데 현실은 그런 바람과 다르다는 것을 잘 압니다. 지극정성은 아니더라도 나름 열심히 기도하지만 자신이 바라는 대로 잘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실망하지 말고 의심을 버리면서 계속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치유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 중 한 명만 예수님께로 돌아와 감사인사를 했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은 완치된 몸을 사제에게 보이고 가족 품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그들은 율법을 따랐고, 도중에 돌아 온 한 명은 율법을 어긴 셈이 됐습니다. 먼저 사제에게 완치된 몸을 보여주고 판결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가족과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데, 그는 그 전에 먼저 예수님께로 가까이 와서 감사인사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치유가 온전히 그분의 말씀, 마음, 의지 때문이라는 것에 대한 깊은 확신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생사가 걸린 율법 조항마저 뛰어넘을 수 있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뵈었고, 그분의 또 다른 그리고 강력한 구원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8).”

 

그분의 얼굴을 직접 뵌 그 나병환자는 그때부터 죽는 날까지 그분의 얼굴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을 결코 잊어버리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다른 아홉 명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며 서운해 하시는 그분의 표정도 함께 기억했을 겁니다. 그가 그 이후 평화롭게 무병장수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어쩌면 나병이 재발해서 다시 격리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랬다면 그는 예수님을 다시 애타게 찾았을 것이고, 그 분의 목소리와 말씀을 기억해냈을 겁니다. 오래 된 일이지만 어제 일인 것처럼 생생한 그 때가 떠올랐을 겁니다. 거기서 그는 다시 ‘예수님, 스승님!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라고 부르짖으며 기도했을 겁니다. 그렇게 그는 그분을 또 만났습니다. 그분이 자신을 만져주지 않아도, 그분을 직접 뵙지 못해도 그분께서 자신에게 자비를 또 베풀어주시리라 확신을 가졌을 겁니다. 그 당시 율법을 어기고 사제보다 먼저 그분에게 되돌아가게 했던 그 확신입니다. 사실 예수님이야말로 대사제이시니 그의 확신이 그를 하느님과 만나게 해준 것이었습니다.

 

살면서 필요한 것이 참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런 모든 것들을 다 이루어주시고 건강하고 평화롭게 살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모든 청원과 바람의 근원에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고 싶은 열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되돌아가 그분을 가까이서 뵐 수 있었던 그 나병환자가가 지녔던 그 확신입니다. 바로 ‘그분’ 이시다는 확신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나병환자처럼 예수님을, 하느님을 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도 그 이후에는 그분과의 만남과 말씀에 대한 기억만으로 살았습니다. 그의 믿음이 그를 살게 했다면, 그분과의 그런 강렬한 만남도 없이 그분의 말씀만을 간직한 우리의 믿음은 얼마나 더 크고 순수한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살게 해줄 것은 자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마태 6,8). 그런데도 우리가 그런 것들을 계속 청하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함일 겁니다. 하느님을 잊어버린 나의 삶과 세상이 어떻게 될 지는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언제나 바라고 청해야하는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가난은 하느님을 만났고 또 만나는 자리입니다.

 

요르단 강에서 나병을 치유의 기적을 체험한 나아만은 그곳의 흙을 퍼가서(2열왕 5,17) 그 흙을 깔고 그 위에 제단을 쌓고 엘리사가 섬기는 하느님께 예배를 드렸을 겁니다. 아니면 그 흙을 볼 때마다 그 하느님을 떠올렸을 겁니다. 우리가 되돌아가야 할 장소는 다름 아닌 바로 우리 마음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바로 저 분입니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은 성실하신 분이니(2티모 2,13), 그분을 찾아 되돌아가면 언제나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시며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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