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3월 16일 가끔은 이렇게

이종훈

3월 16일 가끔은 이렇게

 

엊저녁 하늘이 어두컴컴해지더니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순특강 하러 나가는 길이라 비를 피하려고 달리기를 하듯 차에 올랐다. ‘낮에는 뭐하고 이제야 내리는 거야’라고 불평하며 길을 나섰다. 빗방울은 눈으로 바뀌고 고속도로에서는 눈보라가 쳐서 차들이 비상등을 켜고 속도를 낮추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다 약속시간에 늦겠다는 걱정을 했다. 그 때 형제에게 연락이 왔다. 집에는 폭설이 내려 밤에 올 때는 차를 산 밑에 두고 걸어 올라와야 할 거라는 얘기였다. 실망스러운 소식이었다. 그런데 만약 10분만 꼼지락거렸으면 아예 산에서 내려오지도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 고맙습니다.’

 

늦지 않게 성당에 도착했다. 눈발은 여전했다. 7시 미사에 참례한 교우들은 눈보라가 치기 전에 성당 안에 계셔서인지 밖에 눈이 오는지도 모르셨다. 강의가 끝나면 눈은 그쳤을 거라고 거짓예언을 하며 교우들을 안심시켰다. 강의가 끝나자 나의 거짓예언은 거의 적중했다. 맞아도 될 만큼 눈발은 잦아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길은 미끄러웠지만 봄눈을 두툼하게 이고 늘어진 큰 나뭇가지들이 차창 밖으로 살짝살짝 보였다. ‘우와 내일 아침에는 오랜만에 멋진 구경을 하겠구나.’ 반대편 길은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반면 평소보다는 조금 느리지만 나는 막힘없이 잘 가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다시 한 번 ‘하느님 고맙습니다.’ 집이 가까워지며 산길을 올라갈 마음의 준비를 했다. 외투도 없고 미끄러울 텐데 구둣발로 눈길을 헤치고 가야하니 걱정이었다. 그런데 눈이 치워져 있었다. 천사가 내려와서 치워줬나? 아니다, 날이 따뜻해서 눈이 다 녹았다. ‘하느님 고맙습니다.’ 집 앞에 차를 세우고 개선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집으로 들어갔다.

 

가끔은 이렇게 하느님이 나를 보호해주신다고 느끼게 해주시 좋다. 어두운 믿음의 여정 중에 작은 불빛처럼 내가 걷는 길을 살짝 보여주시고 사막에 작은 오아시스처럼 메마른 마음을 적셔주신다. 원수도 사랑하고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위한 가르침이라고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납득하지만 그 실천은 거의 불가능함을 잘 안다. 그래도 이런 날이 있으면 큰 맘 먹고 이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결심도 해보게 된다. 이제 날이 밝으면 어젯밤 차 불빛에 곁눈으로 보았던 모습을 실컷 볼 수 있을 거다. 지금은 모든 것이 희미하고 주님의 계명도 때론 버겁게 느껴지지만 그날이 오면 모든 것이 환해져서 주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믿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 날을 희망하며 오늘도 또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딛는다.

 

주님, 그래도 가끔은 주님께서 살아계심을 느끼게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우연이고 행운이라고 하겠지만 제게는 그렇지 않음은 주님께서 주신 믿음의 선물 덕분입니다. 우연보다는 행운이라고, 행운보다는 주님의 현존이라고 믿는 사람이 더 행복합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언제나 이렇게 보호해주시고 도와주시니 고맙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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