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3월 26일 용서받은 기억

이종훈

3월 26일 용서받은 기억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가 아니라 제자들이 청해서 예수님이 친히 가르쳐주신 기도다(루카 11,1). 인간이 하느님께 바치고, 하느님이 인간에게 듣기 바라시는 기도이다. 청원기도보다 감사의 기도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주님의 기도 안에는 감사의 내용은 없고 온통 ‘∼소서.’하며말하는 청원들이다. 군대나 가야, 아이를 낳고 키워봐야, 부모가 세상을 떠나신 뒤에야 비로소 두 분에게 진정으로 감사와 죄송스러운 마음이 생기는 걸 보면, 인간이 하느님께 청원만 하는 것은 당연하다.

 

청원으로 가득 찬 그 기도 안에 우리의 몫이 딱 하나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그것이 용서일까? 용서, 가장 간단하지만 가장 어렵고, 자신은 받고 싶지만 남에게는 주고 싶지 않고, 우리 모두에게 절실하지만 서로에게 매우 인색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기도 안에 용서를 넣으셨나보다. 용서받음을 포함해서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실 수 있지만 우리가 이웃에게 베푸는 용서는 오직 자신만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용서보다 고독한 작업은 없을지도 모른다. 외람되지만 예수님이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셨던 것만큼 우리도 용서 앞에서 괴롭다.

 

우리는 하느님께 용서받고 자비를 입었다. 그럴만한 자격이 되고 노력을 해서가 아니라, 정반대로 전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할 수 없는데 어쩌겠나, 봐줘야지. 불쌍하다. 이스라엘 민족은 전쟁에 패해 모든 것을 빼앗기고 이방인의 노예생활을 하게 된 후에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그제야 용서를 청해보지만 하느님께 바칠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알고 오직 통회하고 뉘우치는 마음만 보아달라고 청했다. “지금 저희에게는 제후도 예언자도 지도자도 없고 번제물도 희생 제물도 예물도 분향도 없으며 당신께 제물을 바쳐 자비를 얻을 곳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숫양과 황소의 번제물로, 수만 마리의 살진 양으로 받아 주소서(다니 3,38-39).”

 

예수님은 이런 우리의 처지를 만 탈렌트를 빚진 종에 비유하셨다(마태 18,24). 그것은 현 시가로 수십조 원에 해당한다. 과장된 표현 같지만 사실이다. 뒤돌아보라, 매 번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용서를 청하고 결심하지만 여전히 그러고 있지 않나? 몸도 마음도 점점 굳어지는데 앞으로 달라질 것이라는 고백은 거짓말이다. 마지막 날에 재판장이 나의 죄대로 셈한다면 오늘이라도 죽는 편이 나에게 이롭다. 그러나 그럴 수 없지 않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참 불쌍하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를 용서하신다.

 

그런데 왜 내가 그렇게 용서받았다고 나도 이웃을 용서해야 하나? 당연히 그래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국법에는 물론이고 교회법에도 이런 원리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법전에는 없지만 하느님이 원하신다. 우리에겐 그것이 법이다. 명령이기 이전에 그분이 우리에게 바라시기 때문이다. 나만 용서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도 어렵고 하느님도 어려우시다. 아드님이 피를 흘려야할 만큼 힘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용서에 인색해지는 것은 하느님의 희생과 고통을 잊거나 모르기 때문이다. 늘 기억해야 한다.

 

구원자이신 예수님, 당신의 수고와 고통 그리고 죽음을 언제나 기억나게 도와주십시오. 특별히 이웃의 반복적인 잘못을 이해하고 참아줘야 할 때, 남도 나를 참아주고 있고 주님께서 피 흘리시며 나를 용서하셨음을 기억나게 해주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죄인들의 피난처이시니 당신 품에 숨는 저를 보호하여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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