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9월 13일(한가위) 수확과 만남

이종훈

9월 13일(한가위) 수확과 만남

 

며칠 전부터 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손댈 수 없는 밤송이 안에 기름칠을 한 것 같이 윤기 나는 밤의 모습이 미소 짓게 한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봄에 쾌쾌한 밤꽃 냄새를 참아준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데, 밤을 까먹으며 고맙고 미안하기도 했다.

 

한가위의 정서는 수확, 기쁨, 나눔, 고마움, 풍요로움이다. 하지만 이 축제를 지내는 현실은 책이나 매체에서 말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 같다. 길고 지루한 여행길, 지금은 건강에 별로 좋지 않은 기름진 음식과 그것을 마련하는 이들의 수고스러움, 먼 친척과의 어색한 만남,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 사이에 다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보이지 않는 언어와 정서적인 폭력, 이런 것들 때문인지 아예 긴 연휴를 이용해 여행을 가는 사람들도 부쩍 많아졌다.

 

현실은 이러해도 해마다 반복되는 한가위 축제가 지닌 상징성은 크고 중요하다. 시작이 있었으니 끝이 있고, 그 끝은 마지막이 아니라 수확하는 날로 이 지상 삶의 수고스러움이 끝나는 기쁨과 완전한 쉼이다. 그리고 먼저 떠난 그리운 이들뿐만 아니라 그분을 알게 된 이후로 밀고 당기기를 수없이 반복했던 하느님을 얼굴을 맞대고 만난다.

 

반복은 익숙해지게 하고 잊지 않게 한다. 매해 이 축제를 지내며 나의 삶은 긴 농사이고 마지막에는 수확과 만남의 기쁨이 있다는 희망을 되새긴다. 성경에는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고 …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묵시 14,13)”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은 어리석다고 가르치셨다(루카 12,21).

 

열심히 일해서 얻은 재화를 잘 관리 보관하는 것이 어찌 악한 일이겠나? 주님은 재화가 그 자체가 아니라 쌓아놓은 재화만큼 자신의 생명이 지속되고 또 그것을 행복의 척도로 삼는 그의 믿음이 잘못이라고 가르치신다. 구걸로 연명하고 병들어 동네 개들의 친구가 된 불쌍한 라자로를 문 밖에 데려다 놓아 주셔서(루카 16,20) 그 재화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지 알려주셨는데도 그 어리석은 부자는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다. 영원한 생명은 여기 삶이 끝난 후부터 시작되지 않고 바로 여기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죽음이라는 큰 강을 건너서도 계속 이어진다. 이 사실과 믿음이 오늘 여기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준다. 여기에서 주어진 삶은 소중하다. 그 안에서 하느님이 나와 함께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계심을 알았고, 여기서만 일하고 수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수확의 기쁨이 큰 만큼 재회의 기쁨도 클 것이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 주님을 모르면 이 축제는 의미 없이 먹고 마시는 여러 날 중에 하나이고 가족의 의무 이행의 날이 되어버립니다. 풍성한 식탁에서 나의 수확물을 상상하고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들과 올해부터 그 식탁에 함께 하지 않는 가족을 보며 내가 가야하는 곳을 생각합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그날이 수확과 만남의 기쁨이 되게 오늘을 충실히 살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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