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의 큰 주제의
흐름
준비 - 세례 - 유혹 - 전도
- 제자단 형성 - 구마 - 개인 치유(봉사자) - 다수 치유 - 전도여행 - 나병환자의 치유
준비
무언가를 받아들이려면 그 입구를
잘 정돈해 두어야 합니다. 온갖 쓰레기로 방구석을 어지럽혀 두고는 귀한 손님을 맞이하겠다는 것은 그 손님에 대한 모욕일 뿐입니다. 복음서는 우리
인류의 구원자를 맞아들이는 준비작업으로 구약의 예언과 그 예언의 성취인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을 제시합니다. 이 준비작업에서 눈여겨 볼 수 있는
것은 '길을 곧게 내어라'라는 부분입니다. 길은 과연 무엇이고 '곧게'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땅에 물을 쏟아봅시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내려가고 지대가 높은 곳에는 물이 차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낮아도 그 곳으로 물이 모두 쏠려 버리고 지나치게 높으면 메마른 상태
그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똑같이 다가오시려는데 지나치게 낮은 구석이 있으면 거기에 머무르시고 지나치게 높은 구석이 있으면 거기를
지나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내면으로 다가오시는 분이시고 따라서 우리의 마음 속에도 이런 두 부분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좌절한 마음, 자기
스스로를 폄하하는 마음과 그 반대로 지나치게 교만한 마음, 자기 스스로를 높이려는 마음입니다. 낮은 마음은 주로 과거의 죄의 결과로서
나타납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에서 비롯되는 이 마음을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미리 높여 두기를 바라시는 셈이죠. 또
반대로 지나치게 교만한 마음이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쥐고 흔든다는 이 마음. 이 마음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낮아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선하심을 그 어느것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이 작업만 잘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그리고 그분의 은총은 물 흐르듯이 흘러 들어오게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될 때에, 우리가 군더더기 없이 우리 스스로의 본연적 모습에
충실하게 될 때에 하느님의 거룩한 영은 그와 함께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어린이와 같이 되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한편으로 예수님은 이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을 받으시고 다른 한 편으로 예수님은 이 세례를 도리어 정화하고 축복하고
계시는 셈입니다. 세례가 단순히 '죄를 씻는' 행위의 상징이었다면 예수님을 통해서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거룩한 예식이 된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통한 세례는 '성령'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제 우리의 세례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여전히 물로만 세례를 받는 이들이 많습니다. 진정한 세례의 본질을 알지도 못한 채로 물로 몸을 씻는 행위를 통해서 죄를 씻는 세례를
받고 그걸로 그만이라는 식이지요. 전혀 다른 종류의 세례가 있으니 바로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세례입니다. 물의 세례가 우리의 외적인 것만을
깨끗이 했다면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세례는 우리의 내면을 새롭게 합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의지'를 씻는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미묘한 차이를 이해할 수 있을런지 의문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한 꼬마가 컵을 깨었습니다.
그리고 엄마에게 잘못을 용서받았습니다. 이는 외적인 세례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성령에 의한 세례는 보다 깊은 함축적 의미를 내포합니다.
예를 들어 한 꼬마가 지난 번에 엄마에게 당한 섭섭한 일로 복수하려고 컵을 깨었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진심으로 아이를 사랑하기에 기꺼이 용서
해줍니다. 이에 이 아이는 지니고 있던 섭섭한 마음이 사라지고 진정으로 엄마를 사랑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성령의 세례'와 유사한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외적인 표지로 자신의 신앙을 살아갑니다. 미사를 참례하고 법규를 지키면 '신앙인'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것이 그 내면에
깃들여져 있습니다. 우리는 착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지닌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단순히 외적인 표지만으로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려 한다면 그 신앙은 참으로 빈약한 것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령의 세례를 받도록 합시다. 바로 그 때에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유혹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셨다는 이
부분은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유혹을 받을 수도 있겠지…"라는 그저 막연한 생각 뿐이지요. 하지만 그분이
겪으신 유혹은 진짜였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유혹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나약함을 더욱 잘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나약함'에 빠져드는 잘못을 뉘우칠 때에 그분은 기꺼이 용서해 주시고 우리에게 다시 일어날 힘을 주십니다. 유혹을
크게 겪어낸 사람은 다시 거기에 빠져드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마치 언어를 하나 배운 사람이 다시 그 언어를 배우는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 주변의 유혹들은 한번 극복해 내고 나서 내성이 생기고 나면 크게 어렵지 않게 느껴집니다. 술, 이성, 마약과 같은
지극히 육적인 유혹들에서부터 명예 권력이라는 내부적인 유혹, 그리고 교만이라는 상급 유혹에 이르기까지 유혹에도 수많은 단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걱정할 일이고 일단은 나에게 다가오는 유혹이 무엇인지를 구별해 내는 것부터가 중요합니다. 그걸 알아차리지도 못하면서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실 매일매일 일종의 유혹에 빠져들고 쓰러지는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일어설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도대체 무슨 일을 겪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반복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도의
시작
'하느님의 복음' =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이것이 사실
우리 교리의 전체를 꿰뚫는 내용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당신의 통치가 이루어질 나라가 다가오고 있으니 그분의 뜻에 맞게
살아가라. 그리고 지금까지 네가 해 온 그릇된 것들을 뉘우치는 '회개'를 하고 눈으로 드러나지 않는 '복음'을 영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통치는 깨끗하고 의로운 마음, 사랑과 용서로 이루어지니 우리 역시 그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하고 그 동안 이 땅에서 물들여온 그릇된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교리는 복잡하거나 난해한 게 아닙니다. 정말 간단 명료하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니
다른 쪽으로 자꾸 파고 들다가 그만 교리책이 두꺼워져 버린 것입니다. 교리책 한 권을 달달 외우는 것보다 한번의 사랑의 행위를 실천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작업은 다가온 하늘 나라에 대한 인지와 회개와 복음에 대한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제자단
형성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들은
'어부'였습니다. 절대로 성전의 고위 관리층이라던지 정부 관료들이 아니었지요. 예수님께서 일을 시작하신 건 바로 일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원래 직분에서 크게 벗어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부였고 그리고 사람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어부'에는 전혀 변함이 없는 셈이지요.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굉장히 부담스러워합니다. 뭐가 굉장히 많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상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머무는 자리, 부모, 자녀, 직장인, 학생 등등의 자리에서 그저 마음을 하느님의 나라로 옮기고 같은 일 속에 전혀 다른 방향을 담는 작업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방향입니다. 전에는 '돈을 벌기 위해서', '생존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했다면 지금부터는 '하느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기 위해서' 모든 것을 하면 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 제자됨이 단순히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를 버리고 가족을 버린
것처럼 우리 역시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서 '포기'해야 할 것들이 분명 존재합니다. 세상의 근본에서 하느님의 근본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세상의
근본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이 주는 안락과 평안과 편의에서 마음을 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신앙생활은 있을 수
없습니다.
더러운 영의
내쫓음
더러운 영이 활동한 곳은 다른
시장바닥이 아니라 바로 '회당', 즉 당시에 예식을 집전하던 성전이었습니다. 이 말인즉슨 지금의 교회 안에도 더러운 영은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아마도 다른 곳보다도 거룩한 장소인 회당 안에서 이들은 더 날뛰게 될 것입니다. 특히 회당의 더러운 영은 예수의
존재에 대해서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고 자신들을 성가시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일하려는 이들을 가로막고
그들을 성가시게 하는 이들이 있다면 행여 '더러운 영'에 걸린 게 아닌가 하고 본인 스스로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말은 많고 행동하지 않는 이들'이 주로 그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교회적 지식이나 인맥을 자랑하지만 전혀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배를 사랑하며 자신을 위해서 이 모든 걸 하는 이들입니다. 악마들은 예수님이 누군지 알고 그분의 의도를
알지만 전혀 협력하지 않고 도리어 방해공작을 펼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도 교회의 전체적인 움직임을 알지만 전혀 협력하지 않고 매사에
비판만 하고 전혀 일은 하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장모의
치유
마르코 복음의 첫번째 치유의
장면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행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치유를 받은 뒤에 바로 그들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결국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 일할 이들부터 치유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일하는 수많은 이들 가운데 이 치유를 필요로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무슨 무적이라서 교회 안에서 그런 봉사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 역시도 나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인 셈입니다. 먼저
그들을 보살피고 치유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다른 이들을 위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이를 올바로 인지하지 못하면 가까이 있는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나오는 사랑은 원래부터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보살피기를 내팽개쳐 버린다면 그들은 결국 견디다 못해
떨어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많은 병자의
치유
이어서 예수님은 본격적인 치유
활동을 하십니다. 하지만 이 치유의 근본 목적은 무엇일 것 같습니까? 단지 그들의 육신을 낫게 하는 게 절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치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걸 드러내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보다 극명하게 마귀들의 말을 가로막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치유가 목적이었다면 예수님은 엄청난 광고를 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여 치유 센터를 개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본질적인 치유에 관심이 있었고 마귀들은 예수를 유명하게 만들어 버려서 이를 가로막으려 한 셈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함구령을
내렸습니다.
전도여행
예수님의 목적은 유명해지거나
권력을 얻는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짧은 생애 동안 더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을 알리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래서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으셨고 이곳 저곳 다니시며 가는 곳마다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어둠의 영)을 쫓아내시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나병환자
나병환자에게서 예수님의 유명세가
어떻게 작용했는지 보여집니다. 사실 이 나병환자의 치유는 예수님의 사목 계획에는 없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병환자에게 불쌍한 마음이 드신
예수님은 그 나병환자를 치유하게 되었고 결국 그 나병 환자는 자신의 입을 주체할 수 없어서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널리 퍼뜨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보다 본질적으로 원하셨던 복음화 사업보다는 '치유'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악마들은 이를 원했던 것이지요. 그분의
활동을 가로막고 싶었던 것입니다. 본질은 육의 치유가 아닙니다, 본질은 하느님의 복음이 널리 전해지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은 이 부분에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부자 교회에서 가난한 교회를 돕는답시고 기도보다는 단순히 돈을 보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조심해야 합니다. 돈 맛을
알게된 사람들만큼 복음화 사업에 위험한 존재는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