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기부

 

[마신부와 함께 하는 성경강의] 마르코복음 6장

겸손기도 1,978 2013-10-28 14:22:38

마르코 복음 6장


6장의 큰 주제의 흐름

고향 사람들의 무시 - 열 두 제자의 파견 - 헤로데의 생각 - 세례자 요한의 죽음 - 오천명을 먹인 기적 - 물 위를 걸으심 - 겐네사렛의 치유


고향에서의 복음화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은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분이 그 동안 사적인 생활로서 살아오셨던 곳에도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러 가신 셈입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우리 가족과 친척'에 대한 우리의 자세입니다. 현세적인 그리고 피로 이어진 관계 안에서 때로 우리는 가족 안에서 늘 이 '복음화'를 미루기 쉽상입니다. 언젠가는 기회가 있을 거라는 생각, 또는 '가족인데 뭘~'이라는 아주 가벼운 생각을 바탕으로 때로는 우리가 마땅히 이루어야 할 복음화 작업을 소홀히 하곤 합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육적 본거지에 돌아가셨고 거기에서도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닮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족과 친척에게도 주저함 없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무시를 당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무시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가족과 친척들이 나에 대해서 품고 있는 온갖 생각으로 내가 하는 말의 권위를 무시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결정입니다. 우리는 가족과 친지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참된 권위에 대한 무지

이어 등장하는 예수님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생각의 흐름은 타인에 대한 우리의 통상적인 사고의 흐름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서 놀라면서도 곧이 곧대로 듣기보다 그의 현재의 배경과 권위에 비추어보기 일쑤입니다. 유명한 누군가가 시덥잖은 말만 해도 난리가 나지만 시골 출신의 현자가 제 아무리 주님의 뜻을 드러내어도 사람들은 그의 현재 갖추고 있는 여러 권위와 배경을 두고 무시해 버리기 일쑤입니다. 뭔가 좋다는 말이 있으면 우리는 그 즉시 그 발언자의 권위를 찾아보기 시작합니다. 그가 그 말을 할 만한 권위가 있는지 없는지를 살피고는 그의 권위를 바탕으로 그 말을 다시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예컨대 이런 문구를 만난다면 어떤 반응이 일어나게 될까요?

"그 곳에 가고 싶다. - 성서학 박사 OOO"

사람들은 뒤의 타이틀부터 바라보면서 앞의 말에 의미를 찾기 시작하고 때로는 화자가 전혀 상상도 못한 결과가 도출되기도 합니다. 예컨대 그 박사는 '그 곳'을 단순히 '화장실'을 의미한 것일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박사의 권위로부터 온갖 상상을 유추해서 그 곳이 다름아닌 '예루살렘'이라느니 '천상 낙원'이라느니 하는 온갖 억측을 이끌어냅니다. 또 반대의 경우는 이런 느낌입니다.

"엄마 아빠, 서로 싸우지 마세요 - 우리집 아이"

아이가 진심으로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하느님의 충고를 전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 아이의 발언을 쉽사리 무시하고 맙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가 하느님 앞에 갔을 때에 우리들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전해져 왔던 예수님의 초대를 무시해 버린 책임을 묻게 될 것입니다.


내 곁의 예수님

우리는 지금 교회 안에서 영광을 받고 있는 '예수님'을 만난다면 그분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들으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실제로도 이런 일은 일어나고 있으니 교회의 제일 큰 어른으로 대접받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마디 하나하나에 전 세례는 매번 뉴스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긍정적인 부분입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우리는 때로 보다 중요한 것을 잊고 있으니 우리의 일상의 삶 안에서 실제로 들려오는 나의 예수님의 말씀을 쉽게 무시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25장 40절) 라는 말씀 안에는 단순히 우리가 가난한 이들에게 해 주는 것만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정반대로 여기에는 그들의 '요구'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시사적인 거대한 흐름에는 쉽게 관심을 갖고 참여를 하지만 정작 우리 가장 가까이에 머무르는 이들의 요구에는 냉담하기 쉽습니다. 바로 내 아내, 남편, 나의 아이들과 집안의 어르신의 요구에 우리는 둔감하면서 밖으로는 참으로 선하고 착한 인상을 심어주려는 헛된 노력에 빠져있을 때가 많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우리 가장 가까이에서 무시당하고 살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의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영적인 관점, 즉 믿음이 없는 것에 놀라워하고 계십니다. 어디에서나 존경받는 예언자를 찾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 가장 가까이에 머물러 계시니까요.


기적의 근원

우리에게 솔깃한 구절이 하나 등장합니다. 바로 '기적'에 관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고향에서 굉장히 나약해진 모습을 드러냅니다. 다른 곳에서는 수많은 병자들을 옷깃만 스치는 것으로도 치유했지만 정작 당신의 고향에서는 몇몇 병자 외에는 아무런 기적도 행할 수 없었습니다. 기적의 발동력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가 명백히 드러나는 구절입니다. 기적은 기적을 발현하는 자의 의도보다는 그 기적을 받고 싶어하는 자의 간절한 원의와 믿음에 더 큰 바탕을 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인즉슨, 여러분이 지금 곁에 함께 지내고 있는 그 어떤 사제에게 다가가더라도 여러분에게 간절한 원의와 믿음이 있다면 기적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아무리 용하다는 사람이 오더라도 여러분들이 의심을 품고 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어디로 다가가야 할까요? 어떤 사람을 찾지 마십시오, 오히려 미사를 통해 다가오시는 예수님에게 직접 다가가십시오. 그분의 성체를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믿고 받아모실 때에 우리의 원은 너끈히 채워지고도 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놀람

예수님도 놀라십니다. 모든 것을 미리 알고 계시는 듯한 분이신데 그분의 '놀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우리는 언제 '놀라게' 될까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을 접했을 때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그들의 '불신'에 대해서 놀라고 계신다는 말은 그들이 마땅히 맺어야 할 열매를 맺지 않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제 아무리 고향 사람이지만 당신께서 예상한 믿음의 결과물들이 있어야 하는데에도 그 순간 사람들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되는 신앙에 대한 선택이 그 '외적인 영향' 때문에 좌절되는 것을 보고 놀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놀랄 수 있는 유일한 자리는 우리들이 지닌 '자유의지'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고향 마을에서 예수님은 무척이나 놀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마땅히 거두어져야 할 열매를 기다리고 계시는 중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놀래키지' 않도록 잘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에게서 성경 강의를 받는 분들도 행여 저와 예수님을 놀래키는 일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열 두 제자의 파견

7절은 짧지만 예수님의 '제자된' 이들의 특징을 정말 굵직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 부르시어

먼저 예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되려는 이들은 이를 올바로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하려는 모든 직분은 언뜻 우리가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내가 사제가 되고, 수도자가 되고, 교회 평신도로서 일종의 봉사직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 마치 '내가' 주체가 되어 선택한 일로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흥미를 잃으면 곧잘 떠나 버리려 합니다. 좀 열심히 하는 척 하다가 조그만 난관이라도 만나게 되면 흥미를 잃고 직분을 내던져 버리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잊지 마십시오. 당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부르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이 빠지고 못할 것 같이 느껴져도 주님께서 그만 두라고 하지 않는 이상은, 교회의 합당한 권위가 그만두라고 하지 않는 이상은 제멋대로 결정하는 일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성실히 이행하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는 '부름받은'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

예수님의 직분을 나눠 받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권한 입니다. 무엇 보다도 열두 제자들이기 때문에 다른 권한보다도 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이 가장 핵심이 됩니다. 특히 우리 사제들에게는 이 권한이 있습니다. 우리는 더러운 영들에 대해서 두려움을 지닐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우리에게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당당하게 나서서 더러운 영들 앞에 명령하십시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말입니다. 이 작업은 '고해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평신도 여러분들에게도 주님의 제자 되려는 이들에게는 이 권한이 주어졌다고 믿으셔도 좋습니다. 봉사 직분을 수행하면서 힘들고 괴롭다는 생각이 들고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주님께 도움을 청하시고 이 어둠의 유혹을 떨쳐 버리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 둘씩 짝지어

공동체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무너질 때 다른 사람이 일으켜줄 수 있고 또 서로의 생각을 함께 나누면서 둘의 부족함을 채워 나갈 수 있으니까요. 물론 지금 세상의 단체는 반대의 경우가 더 많습니다. 서로를 짓밟고 올라서려고 하고 또 서로의 부족함을 공격해서 자신이 살아 남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지니고 살아가는 이들이 모인 곳이 바로 주님의 공동체가 되는 셈입니다. 그분의 '사랑과 용서'의 가르침을 지고 나아갈때 비로소 완전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십시오.


- 세상 것에서의 탈피

예수님은 지팡이 하나 외에 아무것도 추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지금의 이 파견은 일종의 '선교 수업'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신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 제자들이 체험해 보아야 했던 과정이었지요. 세상 것에 미련을 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권한과 가르침만을 받아들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사명을 이루고 말지요. 하느님께 기대는 자에게는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 한 집에 머물기

자신의 사명이 다할 때까지 선택한 곳에 머무르는 행위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안에서 진득하지 못하고 이런 저런 것들을 시험해 보려는 것은 결국 우리의 현세 삶에 더욱 합당한 것을 찾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일단 가기로 결심하고 한 번 맡게 된 곳에서는 우리의 사명이 다하는 날까지 머물러야 합니다. 많은 사제들과 수도자들, 반장과 교리교사들은 이를 유념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해진 사명이 다할 때까지 이리 저리 옮겨다니지 마십시오.


- 받아들이지 않고 말도 듣지 않는 이들에 대한 경고

이 부분은 유심히 살펴 보아야 합니다. 신앙을 단순히 좋은 것을 전하고 성가신 일들은 피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분명한 경고를 해줄 필요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면 어떻게 할까나 하는 두려움으로 반드시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는 겁쟁이가 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 회개의 선포

제자들이 선포한 내용은 단 하나 '회개'였습니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가서 이런 저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했겠지만 그 모든 근본에는 '회개' 곧 '방향 전환'이 숨어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방향에서 하느님을 향한 방향으로의 전환이지요. 이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적용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름이 아닌 '방향의 전환'입니다.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세속적인 욕망과 유혹에 저항해서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리고 그분의 도우심과 자비에 우리들을 내어 맡기는 것이지요.


- 마귀를 쫓아냄, 병의 치유

예수님께서 하신 대표적인 두 행위 입니다. 나쁜 것은 쫓아내고 아픈 것은 싸매 고쳐주는 행위. 우리는 이웃에게 늘 이런 마음가짐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나쁜 것을 분별하여 분명하게 쫓아내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어물쩡 '그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내버려 두면 상처가 배로 곪아서 결국 모두가 죽어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아픈 것은 잘 싸매 주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조금 아프다고 내던지거나 그냥 방치하다가는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마귀와 병, 즉 '악의'와 '약함' 사이의 구분을 잘 해야 합니다. 이 분별을 잘 하게 해 달라고 하느님에게 청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시는 분이시니까요.


헤로데 - 죄책에 시달리는 대표적 인물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과거의 한 때의 선택의 실수에서 도무지 헤어나지를 못하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언제나 사람들이 뭐라고 하고 있을까 귀를 쫑긋 세우고 있고 자신의 내면을 통해서 말씀을 걸어오시는 하느님보다는 사람들의 의견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으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그에게 가장 큰 오류는, 그런 자신의 잘못에 얽혀 살면서도 그 잘못을 벗어날 방법을 찾는 게 아니라 그저 두려움에만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이들이 많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에 우리는 기꺼이 그분의 용서를 받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과거에 얽매여 하느님을 두려운 분으로 뒤바꿔 놓은 채로 우중충하게 살아가는 적지 않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루빨리 하느님의 품에 돌아오기를 기원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이어 헤로데의 과거사가 소상하게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세례자 요한을 죽인 사건입니다. 참으로 많은 이들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헤로데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 그리고 그녀의 딸이 주요 인물입니다. 물론 빼놓을 수 없는 존재들이 있으니 '고관들과 무관들, 갈릴레아의 유지들'로 대표되는 세속 권력의 무리들입니다.


음모의 시작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제 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의롭지 못한 일을 꾸짖고 있었지요. 하지만 이 요한의 의로움은 '악의'와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헤로디아에게서 '앙심'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성찰해야 하는 것은 그 어떤 종류의 앙심이라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뭔가 성가시고 좋지 못한 취급을 당할 때면 늘 이 '앙심'이 독버섯처럼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이를 조심해야 합니다. 바로 이 '앙심' 즉 '악한 의도'에서 모든 범죄가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요즘 정치를 논하면서 곧잘 '앙심'을 품는 이들이 보이는데 이런 분들 정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헤로데는 조금은 우유부단한 사람이라 자기의 욕구대로 요한을 감옥에 잡아 가두는 것과 같은 일을 처리하기도 하지만 의로운 세례자 요한의 말을 기꺼이 듣기도 하였습니다.


사건의 진행

헤로데는 사람들의 말에 귀가 얇은 사람이었습니다. 헌데 그런 그가 동네의 유력자들을 모조리 청해 놓고 잔치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헤로데와 손님을 즐겁게 한 헤로디아의 딸에게 헤로데가 공공연한 맹세를 합니다. 악마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온 셈입니다.

어둠의 영들은 우리의 약점을 공격하는 데에 선수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지혜 만으로 그런 어둠의 영들의 활동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지혜와 그분의 도우심에 늘 기대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곧잘 어둠의 영들은 우리 영혼의 도성의 가장 약한 부분을 공격해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헤로데에게는 그 부분이 바로 '허영심'과 '명예'였습니다. 이를 통해서 악마는 헤로데를 죄짓게 할 절호의 기회를 잡은 셈입니다.

헤로디아의 딸은 천진하게도 엄마에게 와서 묻습니다. 그리고 엄마는 품고있던 앙심을 그대로 실행에 옮깁니다. 어찌보면 당연히 계획된 일이었습니다. 바늘 들어갈 틈만 찾고 있었던 셈인데 아주 좋은 기회가 온 것이지요. 소녀는 또 천진하게 돌아가서 그 말을 그대로 옮깁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배울 것이 또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이들을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소녀는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구체적으로 나오고 있지는 않지만 그 위엄있는 분들 앞에 나서서 춤을 출 정도면 사춘기 정도의 어느정도는 분별력이 있는 나이였음이 틀림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충고를 청하는 사람의 악의를 그대로 답습하게 됩니다. 물론 의도의 정도와 앎의 정도에 따라서 매를 덜 맞기는 하겠지만, 한 사람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달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분명히 알았을 터인데도 헤로데에게 가서 그 말을 그대로 전해 버립니다.

헤로데는 고민에 빠집니다. 세력있는 이들 앞에서 자신의 위신과 한 의로운 이의 생명 앞에서 갈등을 하지요. 그리고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는 자신의 위신을 선택해 버리고 맙니다. 우리 역시도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올바른 선택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 반대의 것을 선택해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학교에서 왕따 당하는 학생을 마주하면서 그 아이를 도와주면 다른 친구들에게 당할 취급을 두려워하는 모습, 걸인에게 동전을 쥐어주면 주변에 걸어가고 있는 이들의 시선을 받을 것을 걱정하는 모습, 퇴폐적인 술자리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할 때 직장에서 당할 취급을 걱정하는 모습, 누군가에 대해서 수근거리는 자매들 사이에서 그런 일은 주님 보시기에 옳지 않다고 했을 때에 그 일당 자매들에게 당하게 될 수모… 헤로데는 우리의 모습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세례자 요한은 한 권력가의 그릇된 선택 속에서 목숨을 잃고 맙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 역시도 이런 그릇된 선택 때문에 무죄한 이들이 고통당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시다


피정

파견 되었던 사도들이 돌아와 한 일을 보고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잠시나마 휴식을 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휴식'을 무척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하지만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라는 걸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휴식을 한답시고 더 시끄럽고 번잡한 곳으로 가는 이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참된 휴식은 영과 육이 모두 함께 쉬어야 합니다. 그것이 '피정'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거기마저 쫓아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정당한 휴식' 마저도 희생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르침을 시작하십니다. 무엇이 우선인가가 뚜렷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그들임에도 가엾은 이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가르침을 시작하십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참 감동적인 부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인 여러분들은 '휴식'의 가치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예수님 시대처럼 그렇게나 정신없이 일할 이유는 거의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고요한 시간을 잃지 마십시오. 현대의 우리의 문제는 사람들이 하도 많이 몰려와서 정신이 없는 게 아니라 우리의 정신이 너무 부산스러워서 고요를 찾지 못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의 고요한 곳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 찬미와 감사의 제사

그 외딴 곳에서 늦은 시각이 다가오고 사람들은 굶주려 있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을 보내어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하게 하려고 하는데 예수님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명하십니다. 제자들은 '빵 걱정', 즉 현세적인 걱정을 합니다. 사실 이 부분은 예수님의 미리 각본이 짜여진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중요한 한 가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부족함이 없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 미흡한 가진 것

먼저 예수님은 가진 것을 파악하고 제자들에게 확인 시킵니다. 그들이 가진 것이라봐야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분명히 모자랐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 자리잡기

예수님은 사람들을 정돈하는 것도 잊지 않으십니다. 그저 빵을 축복해서 대뜸 사람들에게 내던지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도 그 신비에 참여하게끔 준비를 시키신 셈입니다. 나중에 이 부분이 왜 중요한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 감사와 찬미

예수님은 가지고 있던 미흡한 것을 들어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줍니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차 버렸습니다. 결국 5000명이 빵을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은 셈입니다.

자, 이즈음 했으니 눈치를 채셔야 합니다. 어디서 익숙한 장면이 아닙니까? 우리가 가진 미흡한 것을 들어 바쳐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를 드리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너끈히 먹이고도 남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행위… 바로 미사입니다!!!!! 예수님은 첫 미사를 드리신 셈입니다. 물론 미사의 탄생은 최후의 만찬으로 이루어지지만 이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이야말로 더할나위 없는 미사의 은총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우리들이 바치는 것은 너무나도 미약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은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너끈히 먹고도 남는 은총이 부어집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앞서의 것들이 필요합니다. 1) 미약하나마 우리가 가진 것을 바쳐야 하고 2)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준비도 시켜야 하고 3)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를 미사에 참여할 때에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무엇을 바치러 가져옵니까? 아니면 아무 준비 없이 다가옵니까? 미사를 집전하는 이는 받아들이는 이들이 이 감사와 찬미의 제사에 참여할 준비를 합당하게 시키는지요? 그들의 말씀에는 힘이 있고 사랑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들이는지요? 준비없는 이들을 끈기와 인내로 잘 가르치고 있는지요? 우리는 미사 안에서 진정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지요? 아니면 어디서 가져왔을지 모를 우리의 탐욕을 미사 안에서마저 드러내면서 하느님을 성가시게 하는지요?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충분히, 너끈히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지요? 반성하시기 바랍니다.


물 위를 걸으시다

예수님은 언제나 '기도' 하셨습니다. 밥 먹을 틈도 없이 오천명을 가르치시고 빵을 축복해 먹이시고 그리고 나서도 언제나 '기도'를 잊지 않으십니다. 기도는 예수님의 힘이었고 근본이었습니다. '저 사람이 저런 힘이 어디서 나올까?' 싶다면 그의 근본에는 하느님을 향한 기도가 숨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 위를 걷기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을 '신비'라고 합니다.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 없고 우리 인간의 이해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때로 우리가 사는 세상 안에서도 '불가해'한 일들이 벌어지고는 합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사건도 그러합니다. 믿음이 없는 우리들에게는 '말도 안 돼는' 일이지만 예수님에게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 되어 버립니다.


제자들의 상황

제자들은 풍랑에 시달리고 거기다가 물 위를 걷는 존재(우리야 하도 많이 들어서 익숙하지만 상상해 보십시오, 저녁 무렵에 물 위를 걸어오면서 다가오는 존재를 말이지요.) 앞에서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여 비명을 질러대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참 코믹하기도 한 순간입니다. 남자들이 힘겹게 노를 젖다가 다가오는 대상에 비명을 지르고 있는 모습 말입니다. 사실 제자들의 상황은 바로 우리들의 현재 상황입니다. 세상의 풍랑에 힘겹게 머물다가 다가오는 세상의 상식을 넘어선 존재, 바로 예수님이지요. 우리는 그런 예수님 앞에서 비명을 질러대고 있는 겁니다. 풍랑도 힘겨워 죽겠는데 미지의 대상이 오니 우리의 목숨이 위태하게 느껴지는 거지요. 그분이 실제로 어떤 목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지 따위는 이미 공포심 때문에 잊어버린 지가 오래입니다. 예수님은 와서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 이해가 가시는지요?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오시는 분입니다. 더군다가 그분을 모시고 나니 풍랑이 순식간에 멎어 버립니다. 그들은 빵의 기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음이 닫혀 있었던, 너무나 세상적인 것에만 몰두해 있었던 셈입니다.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다.

예수님 일행은 가는 곳마다 할 일이 천지입니다. 무엇보다도 '아픈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를 영적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현대에는 아픈 사람을 마주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영적으로 아픈 이들이 즐비합니다. 결국 몸의 병도 마음의 병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님을 전해 주어야 하고 그들이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게 그분의 말씀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 사명을 소홀히 하고 있는 우리들이지요. 그분의 옷자락에 손만 닿아도 사람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이해하실 수 있으신지요? 도와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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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8 피에타 댓글+2 이상근 마태오 2019-02-21 2610
507 제대초 장식으로 사용한 그림들입니다. 김윤중(JM프란치스코) 2015-07-02 2590
506 봄.. 폰 배경화면 신 아드리아나 2020-02-10 2560
505 대림절 이미지 댓글+1 신 아드리아나 2019-12-11 2489
504 어린양과 예수님 댓글+1 김성재 2014-12-27 2469
503 [나는] 젊은이 미사곡 음원 - 김종성 신부님 댓글+1 admin 2013-11-29 2457
502 바오로 선교 지도입니다 ^^ 노주은 2013-09-17 2455
501 항상 감사하십시오. 댓글+1 박지안 2019-06-16 2291
500 순교자성월 댓글+1 김현정 2015-09-16 2205
499 빛이 된 십자가, 빛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님 신_세례자 요한 2021-04-02 2197
498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댓글+1 박지안 2019-06-16 2193
497 [캘리]평화 댓글+1 믿는대로 2019-06-21 2190
496 삼위일체 댓글+3 이상근 마태오 2019-02-13 2183
495 구유 댓글+3 아녜스 2017-12-03 2177
494 미안해... 너무 미안해.. 잊지 않을게 이은아 2014-07-30 2159
493 봄..기쁜소식.. 폰 배경화면 댓글+2 신 아드리아나 2020-02-12 2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