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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부와 함께 하는 성경강의] 마르코복음 7장

겸손기도 1,282 2013-10-28 14:24:38

마르코 복음 7장

7장에 이르러 예수님의 가르침은 슬슬 본질적인 것으로 접어들기 시작하십니다. 여전히 치유를 계속하시지만 보다 내밀한 가르침을 위해서 그런 일들을 하신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 시작점이 되는 것은 바로 첫번째 에피소드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이루어진 대화입니다.


껍데기와 알맹이

우리는 곧잘 껍데기에 사로잡히고 외면적인 것에 빠져들어 보다 참되고 소중한 내면의 가치들을 무시하기 일쑤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부분은 따로 설명이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너무나 훌륭히 잘 설명해 두셨기 때문이지요.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이 말씀만 그 의미를 잘 이해하고 새기고 살아간다면 이 부분은 충분히 이해를 하신 셈이 됩니다.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

사람을 진정으로 더럽히는 것은 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지금 일본 원전 사고 때문에 방사능이 퍼진다며 다들 난리가 났습니다. 하지만 그 방사능마저도 우리를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 그 보기좋은 예로 일본 나가사키의 나가이 타카시 박사는 도리어 방사능 속에 머무르면서 자기 몸을 바쳐 방사능 연구에 헌신했습니다. 방사능이 그의 몸은 죽여 버렸지만 그의 고귀한 영은 여전히 살아남은 셈이지요. 이처럼 밖의 것은 몸은 죽일지언정 우리의 마음을 더럽힐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실제로 한 인간 존재를 더럽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이런 것들이 밖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나와 실제 한 인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생각을 조금 더 전개시켜본다면 타인의 '악'마저도 우리를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 우리 안에 올바른 방어체계가 구축되어 있다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더럽힐 수 없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욕'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욕에 반응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예를 들어 갓 태어난 아기에게 제 아무리 욕을 한다고 해도 그 아이가 그걸 알아들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내면에 그 욕에 대한 반발 시스템이 없다면 그 욕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폭력'도 같은 이해를 해볼 수 있습니다. 만일 나무에서 열매가 그냥 뚝 떨어져 맞았다면 우리는 그냥 머리를 한 번 쓸고 넘어갈 겁니다. 하지만 그 나무 위에 어떤 꼬마가 의도적으로 열매를 던지면 우리는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나게 됩니다. 이처럼 같은 행위를 당하더라도 우리 안에 반응 체계가 없다면 그 행위는 생각만큼 심각하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타인이 '악'으로 우리에게 반응할 때에 우리 내면에 저항 시스템을 두지 않으면 그 행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 밖에서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려는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 우리를 진정으로 더럽히는 것은 우리 내면에서 우리가 의도적으로 뽑아내는 것들입니다.


이방 여인의 믿음

예수님은 드러나기 싫어했다고 분명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기'나 '명예'에 전혀 연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하고 싶으셨던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회개의 선포와 하느님 나라의 도래였습니다. 그것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면 그분은 어떤 것이든 마다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그분의 자세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마음을 하느님께 모았다가도 다시 흐트리고, 곧잘 주변의 것들에 빠져들곤 합니다.


예수님의 표면적 거부와 보다 심오한 뜻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이방 여인이 다가옵니다. 그녀는 자기 딸에게 들린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이 일만 보면 예수님으로서 거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니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부정적인 의사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좋아 보이는 일'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보다 심오한 원의를 살펴볼 수도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결국 원하신 것은 이방 여인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선포를 하고 다니셨지만 결국 '믿음'이 있는 이들을 찾아 다니신 셈입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을 내어줘도 받을 사람이 마음이 없으면 헛고생을 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것을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신 것이지요. 복음 선포에 있어서 마냥 하느님을 믿으라고 부르짖는 것도 필요한 때에 필요한 일이 될 수 있지만, 수용자의 '믿음'을 분별하는 것 역시 중요한 일입니다.


겸손의 가치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해 봅시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말을 보다 직접적으로 하면 "너는 우리 가족 아니다. 너의 아이들은 강아지고 너는 개다. 그러니 이 좋은 빵은 못주겠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복음의 구절을 살펴보면 보다 더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마르코 복음의 이 구절 만으로도 충분히 그 정황을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에 그 여자는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아이들이 '강아지'임을 인정했고, 결국 자기가 '개'인 것을 받아들인 셈입니다. 그럼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새로이 청을 드린 셈입니다. 결국 여인은 이 '겸손'의 시련을 통과했고 자기가 원하던 바를 얻게 됩니다.


청원기도의 틀

이렇게 우리는 '청원기도'의 기본 틀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회당장의 딸, 하혈하는 여인, 이방여인에 이어지는 구도에서 우리는 '청원기도의 틀'이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본은 우리의 '원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신앙의 다가섬'입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시련의 극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가지 조건이 합당하게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결국 원의를 이루게 됩니다. 이든 저든 원의가 있어야 하고, 그 원의를 들고 예수님에게 믿음을 가지고 다가설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들고갈 수 없는 원의를 들고 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괜스레 '엄청난 시련'만 겪고 나자빠지게 될 테니까요. 시련이 얼마나 지속될지 얼마나 큰 것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성경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그 즉각적인 응답이 요구되는 것이었지만 때로 이 시련은 우리 평생을 두고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모쪼록 의연히 잘 견뎌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원하는 것을 얻게 될 것이고 원하는 것 그 이상을 기꺼이 얻어낼 것입니다. 하혈하는 여인이 단순히 육의 병만을 치유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구원'을 얻은 것처럼 우리 역시도 단순히 우리가 원하는 것을 넘어서서 보다 참되고 좋은 것,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시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이 하나를 사람들이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은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이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는 사람들에게 뭔가 보여주어서는 안될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군중은 손을 얹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엉뚱한 행동을 그에게 '사적인 자리에서' 하신 셈입니다. 손가락을 귀에 넣고 혀에 침을 바르셨습니다. 이는 벙어리에게 필요한 행위였습니다. 그가 귀와 혀로 분명히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느끼게 하기 위한 수단인 셈입니다.


사람들의 의도와 예수님의 의도

사람들의 의도는 예수님의 의도와 전혀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신기한 일을 보기를 원한 셈이고 예수님은 그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그릇된 의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를 따로 데리고 나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손을 얹는' 행위를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 따위는 중요치 않았고 지금 눈 앞에 있는 이가 당신이 하는 일을 이해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귀에 손가락을 넣고 혀에 침을 바르는 행위는 그 귀먹고 말 더듬는 이에게는 분명한 치유 행위로 인식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회당장의 아이들 말씀 하나 '탈리타 쿰!'으로 일으키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에게 다른 행동은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그 병자의 수준으로 다가가십니다. 그가 이해하고 깨닫게 하십니다. 이 작업이 우리 예수님을 담은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알고 믿는다 해도 이를 모르는 이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수준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은 예수님

이 일 역시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장애가 될 일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엄명하지만 사람들의 놀라움은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만일에 사람들이 알리지 않았다면 분명 고관들의 관심사는 예수님에게서 더욱 멀리 있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죽음의 시간은 보다 동떨어졌을 것이며 예수님은 보다 많은 이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사람들로서는 이를 참을 수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여기서도 배울 것이 있습니다. 무조건 좋은 일이라고 하여 그것을 사방에 퍼뜨린다고 그 최종 결과가 좋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언제나 주님의 목소리를 충실히 듣고 따르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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