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기부

 

[마신부와 함께 하는 성경강의] 마르코복음 9장

겸손기도 1,197 2013-10-28 14:28:20

마르코 복음 9장


하느님 나라의 관상

살아있는 동안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사람. 무엇보다도 먼저 이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비록 '모두'는 아니지만 '더러'는 그렇게 된다는 말을 비추어 단순히 한 명을 꼭 집어 건네주신 은총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는 한 편으로 단순히 '영성적'인 표현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시간의 관념'에 해당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두 가지 시간

시간은 언제나 두 가지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흘러가는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때를 채워가는 시간입니다. 이 두 번째 관점에서 많은 이들은 이미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체험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느님의 권능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세상, 언제나 하느님께 마음을 둔 이들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영광스로운 모습으로 변모

앞서의 예수님의 예고가 끝나고 6일이 지난 후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십니다. 베드로는 믿음을, 야고보는 희망을, 요한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주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여 반석이 된 사람이고, 야고보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그것을 청하고 받기를 바랬던 사람이고, 요한은 늘 예수님의 사랑을 가득 받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 제자를 데리고 높은 곳에 오른 예수님은 순간 당신의 옷이 새하얗게 변화되기 시작하고 구약의 두 대표적인 예언자 엘리야와 인도자 모세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존재에 있어서 엘리야는 희망의 완성이라 할 수 있었고, 모세는 신앙의 완성이라 할 수 있으며 예수님은 바로 그 둘을 품고 사랑의 완성을 이루신 분이십니다.


두려움

헌데 베드로라는 여전히 미흡한 지상의 존재가 그들에게 제안을 합니다. 다름아닌 초막 셋을 지어 그들을 이 땅에 잡아두려 합니다. 하지만 사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랐습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고 행여 그들에게서 무슨 말이 들리는지 귀를 기울여야 할 판에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인 셈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겁'이라는 것은 '미지의 것'에 대해서 인간이 가지는 감정적 반응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자세히 알고 있다면 '겁'이 생겨나기보다는 그에 대한 대책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태풍의 위력도 모르고 방사능의 해악도 모르고 교통사고가 언제 날지도 모르고 하니 그러한 종류의 것들에 대해서 자연스레 '겁'을 집어먹게 되는 셈입니다.


수동성과 몰이해

아니나 다를까 구름이 그들을 덮고 그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우리는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두 예언자와 예수님의 천상의 모습은 사라지고 지상의 예수님만이 곁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날 때까지 입을 다물 것을 명하시고 예수님의 제자답게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는 여전히 예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난다는 것이 도무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자기들끼리 서로 물어봅니다. 우리 역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는 '죽은 이들 가운데 살아남'을 과연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모르긴 해도 수많은 이들이 단순한 육적 재생을 막연하게 상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육신은 어떻게든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엘리야의 재림

제자들은 율법학자들의 의견을 묻습니다. 아무래도 그들은 당시의 학식 있는 이들의 의견을 들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들은 비록 행실은 올바르지 못했을 지언정 그들이 지니고 있는 학적 권위는 여전히 하느님에게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니 우리는 장상에 대해서 삶이 뒷받침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며 쉽사리 그의 의견을 무시하려 들기 일쑤입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말에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을 바탕으로 보다 본질적인 것에 마음을 두고 찾아내는 시도를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이 복음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하지만 이어 보다 더 정확한 해석을 덧붙이십니다. 물론 율법학자들이 근거를 두는 성경을 바탕으로 말이지요.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과 멸시를 받으리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느냐?" 엘리야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셨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엉망으로 다루어 버렸습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님의 영을 담은 이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우리 죄많은 '군중'은 그런 이들을 곧잘 무시하고 천시하고 비난하고 비판하기 일쑤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을까요? 우리에게 돈을 더 벌게 해 준다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우리를 보다 참된 길로 이끌어 주겠다는 사람입니까? 이미 답은 우리 스스로 알고 있는 셈입니다.


제자들의 논쟁

시작은 산에 올라가지 않았던 '다른 제자들의 무능'에서 비롯됩니다. 어느 더러운 영에 들린 아이가 있는데 제자들에게 맡겨 보았지만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율법 학자들과 '권위'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몇 가지가 혼합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먼저는 그들의 무능력이었고, 다음은 율법학자들과의 논쟁입니다.


무능력

우리의 능력은 어디에서 비롯될까요? 우리는 인간 존재로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순식간에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없고, 너무 세밀하거나 너무 큰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한 나약한 인간존재일 뿐입니다. 우리의 능력은 저마다 거기서 거기일 뿐입니다.

하지만 한 아이가 능력이 없더라도 아버지가 힘이 있으면 그의 능력을 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분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동안은 그분이 마치 우리 일을 당신의 일처럼 생각하시고 돌보시겠지만 우리가 아버지에게 전혀 충실하지도 않은데 말도 안되는 일을 가져온다면 아버지는 관심은 커녕 도리어 우리를 꾸짖으실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한탄하신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이 말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이 곧 떠나신다는 말이고, 우리는 예수님 없이도 그분이 하신 일을 해 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능력의 전달

이제 예수님이 일을 시작하십니다. 먼저는 그 문제가 된 아이를 부르십니다. 그러자 곧 아이가 발작을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시간을 좀 두고 아버지에게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된 거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에는 언제나 수용자의 능력도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음식을 마련해서 건네 주려고 해도 받으려는 사람이 그릇을 준비하지 않으면 건네줄 수 없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일에는 반드시 수용자의 의도와 능력도 먼저 고려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하실 수 있으면" 도와 달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가능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번 사건의 핵심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아버지에게 그리고 주변에 서 있는 모든 이에게 '믿음'의 위력에 대해서 드러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전능하신 아버지를 믿는 이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 말은 전능하신 분의 위력을 믿지 못한다는 것의 반증일 뿐입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일은 '전능하신 분의 뜻'이지 '우리의 뜻'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뜻을 위해서 우리의 뜻을 희생하고 심지어는 고통을 당할지언정 그분의 뜻을 이루는 것을 우선으로 삼아야 합니다. 예컨대 이번 복음의 사건에서는 하느님은 당신의 위대함을 외아들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셔야 했습니다. 헌데 우리가 이런 복음의 구절을 읽었다고 다른 이에게 가서 그것을 '치유행위'로 함부로 드러내려고 하는 데에는 다름아닌 '우리의 뜻'이 숨어 있기 쉽상입니다. 예수님이 치유를 했다고 해서 우리도 무턱대고 치유를 할 수 있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관점이 틀려먹었습니다. 예수님은 '치유'를 하신 게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셨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나아가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치유'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보살핌'이 더 절실하고 그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입니다. 더 세세하게 설명을 드리자면, 우리에게 요구되는 하느님의 뜻은 일상 안에서의 '인내', 이웃을 향한 '친절', 미운 사람을 향한 '용서'와 같은 것들이 더 절실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 우리에게 부족할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뜻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으로 이루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우리는 불가능했는가?

제자들이 와서 자기들은 왜 그렇게 할 수 없었는지를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기도'의 가치를 언급합니다. 만일에 제자들이 기도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여러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직접 이루었던지, 아니면 기도를 통해서 자신들의 부족함을 깨닫고 겸손되이 사양을 했던지, 아니면 예수님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적어도 '논쟁'을 시도하지는 않고 인내와 사랑 속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았고 하느님께서 그 순간 자기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수난과 부활의 두 번째 예고

예수님은 당신에게 일어날 일을 다시 알리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여전히 제자들은 이를 알아듣지 못합니다. 살려고 나온 세상인데 자꾸 수난 당하고 죽는다고 하니 제자들, 아니 우리들도 마찬가지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이 운명은 단순히 당신 홀로 이루실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곳 그분을 따라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인 셈입니다. 우리는 수난 당하고 죽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를 뿐더러 그 뜻을 풀이해 달라고 하기도 두려워하는 실정입니다.


가장 큰 사람

제자들이 두려워한 이유를 바로 알 수 있는 구절이 나옵니다. 카파르나움으로 가는 중에 제자들은 누가 더 큰 사람이냐로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죽기보단 살기를 낮아지기 보단 높아지기를 바라고 있었던 셈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누가 더 힘이 있고 정통성을 지니고 있느냐로 논쟁하기 일쑤입니다. 천만에요. 정 반대의 방향을 바라보고 거기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누가 더 힘이 있고, 누가 더 주도권을 쥐고 있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가장 낮은 곳에 머물려고 힘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단순하고 명료한 말로 이를 정리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상대의 약점을 수용하는 사람

나아가서 어린 아이를 받아들이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어린아이는 성경 안에서 여러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이 구절에서는 '나약한 사람', '약점을 지닌 사람', '보완해 주고 도와 주어야 할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어린아이를 주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 주변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곳 볼리비아에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이 많아서 실제적인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고, 한국에는 정서적으로 감정적으로 나약하고 병든 사람이 많아서 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을 잘 추스리고 받아들이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반대하지 않으면 지지하는 이

우리 이웃 형제 종교들에 대해서 잘 성찰해 보아야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곧잘 막연한 적대감으로 상대를 바라보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들이 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마저도 깔보고 무시합니다. 이는 다른 종교에서 우리를 볼 때에도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상대의 약점을 찾아내어 비판하고 깔아 뭉개면서 우리의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하는 아름답고 좋은 일들은 곧 같은 주님의 이름 안에서 행해지는 것들입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을 늘 가슴에 품고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죄의 유혹

앞서 계속 이야기한 부분이 인간의 '나약함'이라면 이번에는 '악의'와 '죄의 유혹'에 대한 부분입니다. 나약함은 보완되고 도와 주어야 하지만 '죄에 기우려는 경향'은 단호히 잘라 버려야 합니다. 간단한 예로 아직 다리에 힘이 없는 아기는 도와주고 일으켜 주고 보듬어 주고 사랑해야 하지만, 아기의 다리에 붙어 피를 빨고 있는 거머리는 빨리 떼어 내어 주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죄짓게 하는 사람과 욕구들은 한시바삐 끊어 버리는 게 좋습니다. 그것을 방치하다가는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마저 영원한 죽음으로 이끌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금

마지막 날에 우리는 모두 거대한 정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고, 우리의 육은 이미 우리가 지상에서도 보듯이 이 땅에 남겨두고 영혼은 하느님 앞에 나아가 모종의 시험, 즉 불소금에 절여지게 됩니다. 우리 안에 들어있는 죄의 경향들 처럼 하느님에게 합당하지 못한 것들은 소금에 절여지면서 사라지게 되고, 그 소금의 과정에도 유일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 것, 즉 우리 안에 간직하던 소금은 남겨지게 될 것입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이 소금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소금입니다. 우리 안에 이 소금을 간직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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