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복음 10장
혼인과 이혼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군중을 가르치십니다. 좋은 것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지요. 그들의 눈이 열리고 그들이 보다 기쁘고 행복해지기를 바라십니다. 쓸데없는 틀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바라시는 거지요.
바리사이들의 목적
헌데 바리사이들이 다가옵니다. 그들의 목적은 굉장히 뚜렷합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험'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 기준에 합당한 시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만족하게 되면 문제가 없지만 그들이 만족하지 못하면 그들이 만족할 때까지 계속 입증되어야 하는 무엇이었지요. 그들의 기준은 이미 '하느님의 뜻'에서 한참 멀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순수한 마음,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을 재어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마음을 바탕으로 예수님을 삐딱하게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우리 주변에 숱하게 있습니다. 이들은 옳은 것을 옳다고 하지 못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지 못하는 인간들입니다. 이들의 목적은 세상이 모두 '나의 뜻'을 받들어 옳다고 해야 겨우 만족할 정도이니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고 이들은 언제나 화가 나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것을 파괴하려 듭니다. 자기와 의견이 맞지 않으면 누구든지 '적'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들을 파괴하려 들지요. 예수님을 앞에 둔 바리사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혼인' 문제를 두고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지금에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마찬가지로 큰 문제였나 봅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과연 이 사람들에게 솔깃한 질문에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시는지를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규율을 되물어봅니다. 사람들은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은 모세가 허락하였다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보다 본질적으고 그 안에 숨겨진 것을 밝혀내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마음의 완고함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혼인 문제는 참으로 굵직한 주제입니다. 혼인한 사람들은 너도나도 한번쯤은 이런 어려움에 직면해 왔습니다. 즉 배우자와 마음이 맞지 않는 것이지요.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저 다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각자는 오류와 약점도 지니고 있습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지요. 이 다름을 받아들이고, 서로의 약점과 오류를 받아들이는 작업이 항시적으로 필요한 현실입니다. 이는 비단 부부 사이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부 사이에 이것이 더욱 문제시 되는 것은 부부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부부는 하나, 즉 한 몸입니다. 우리 몸의 지체를 떠올려 봅시다. 왼손이 아프다고 오른손이 왼손을 잘라버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감싸고 치유될 때까지 애쓰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내 몸'이기 때문이지요. 부부 사이의 문제는 같은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법적인 절차를 따지고 묻기 이전에 보다 본질적으로 나는 그를 내 몸처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실패하기 때문에 그 뒤에 사람들은 '법적인 절차'를 고심하게 됩니다. 사랑하지 않기에 헤어질 수단이 필요한 것이지요. 하지만 부부는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함부로 갈라놓을 성질의 것이 아니지요.
간음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이 구절로 예수님은 부부 사이의 '죄악'을 분명하게 명시하십니다. 법의 선이라는 것은 늘 양측으로 작용합니다. 사랑에 충실하려는 이에게는 '보호'의 구실로 작용하고 반대로 사랑에서 벗어나려는 이에게는 '단죄'의 구실로 작용을 합니다. 모쪼록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이 구절이 여러분들에게 '보호'의 구실로 늘 작용을 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조금이라도 마음이 시리고 있다면 그건 이미 우리 마음에 '갈라섬'의 움직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신호를 잘 준수하는 사람에게 눈앞에 신호등이 나타나면 또 하나의 준수할 사항일 뿐이지만, 언제나 신호를 어기려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신호등은 성가시고 귀찮고 회피하고 싶은 존재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규율을 우리 양심의 척도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린이
앞서 어린이를 '미성숙한 존재'로 설명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예수님이 받아들이는 '어린이'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이번에 등장하는 어린이들은 참으로 순수하고 순박한 이들의 대표주자입니다. 언제나 현재에 충실하고 과거나 미래에 얽매이지 않은 순수한 존재를 의미하는 '어린이'와 같은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어린이들을 절대로 거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품어 안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예수님은 '결코'라는 단어까지 쓰시면서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음흉함'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늘 어린이와 같이 현재에 충실하고 다른 군더더기 생각이 없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표정
덧붙여 아이들이 예수님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린 아이들은 무서운 사람에게는 절대로 다가가지 않습니다. 그냥 울어버리고 말지요. 하지만 예수님에게 아이들이 기꺼이 다가갈 수 있었고 그 품에 안길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평소에 얼마나 온화하고 온유하며 많이 웃으셨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중세 시대의 엄숙한 남성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일쑤입니다. 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 주님은 참으로 호탕하시고 잘 웃으시며 온유하고 온화하신 분이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한 사람이 달려옵니다. 그리고 무릎도 꿇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선하신 스승님'이라고 부르며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묻습니다. 그가 달려왔다는 것은 그의 마음의 의도를 드러냅니다. 그는 예수님을 찾고 싶었고 그분에게 보다 빨리 이르고 싶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무릎을 꿇은 것은 그의 내면의 높이가 굉장히 낮다는 즉 겸손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선하신 스승님'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찾고 있는 것이 현명하거나 학식이 많은 게 아니라 '선의'를 찾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며, 나아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질문을 통해서 이 사람의 관심사가 '영원한 것', '신적인 것'임을 드러냅니다. 적어도 이 사람은 예수님을 시험하는 나쁜 의도를 가지거나 또는 세상적인 목적(치유, 빵)으로 예수님을 찾은 게 아닙니다.
선하신 분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선함'을 부인합니다. 그리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만이 선하심을 선언합니다. 하지만 왜 그러신 걸까요? 이 지상의 인간들 중에 예수님이 선하지 않다면 누가 선할 수 있는 걸까요?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한 마디 말씀으로 모든 인간은 모종의 '부족함'과 '결함'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 당신 자신에게조차도 '완전한 선'을 유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오직 '하느님' 만이 선하시다는 것, 나아가 그분을 우리 안에 담아야지만 인간은 오직 '선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함에 있어서 인간 예수님이 신적 예수님에게 겸손되이 자리를 양보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 신적 예수님, 즉 성령을 우리 모두에게 선사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계명
예수님은 계명을 절대로 '무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청년에게 '계명들'에 대해서 물어 보십니다. 그리고 이 청년은 그러한 계명을 어릴 때부터 열심히 준수해 왔다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이한 말씀과 활동 속에서 곧잘 '규정'을 무시하려고 들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은 '규정'을 무시하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규정' 안에 들어있는 본질을 드러내어 밝히시고 그 본질을 준수하도록 가르치신 것이지 '규정' 자체를 깡그리 없애 버리시려고 의도하신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 점은 소위 갓 성경을 공부하는 분들이 참으로 주의하셔야 하는 부분입니다. 겉멋만 들어서 모든 규정이 마치 필요없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십니다. 이 청년은 참으로 바람직하게 살아온 셈입니다. 그리고 그 청년에게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십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하지만 그는 이 예수님의 '해법', 또는 '조언'에 기뻐하기보다는 '울상'이 되어 떠나갑니다. 이제부터 이 청년에게 일어난 일을 조금 더 깊이 조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는 여정에는 몇 가지 단계가 필요한 셈입니다. 처음으로 우리는 많은 경우에 '어둠'에 빠져 있기 일쑤입니다. 우리는 이 어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어둠을 벗지 않고는 단 한 발자국도 하늘 나라를 향해서 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악의에서 비롯되는 죄악들을 벗어내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계명들'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청년에게 물으신 것이지요. 그리고 청년은 거뜬히 이 시험을 통과해 온 셈입니다. 적어도 청년은 더럽혀져 있지는 않았던 것이지요. 그렇게 우리의 영을 깨끗이 하였으면 다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우리의 드러난 나약함입니다. 다리에 힘이 없는 아기가 걸을 수 없듯이 우리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의 약점을 보완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들이 덕을 수련하는 여러가지 방법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서 '악'을 찾을 순 없어서 사랑스러운 눈으로 볼 수 있었지만, 다른 한 편 청년에게 엄청난 '나약함'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죄를 짓는 건 아니었지만 청년의 '재물'이 청년의 마음을 잡아두어 청년을 허약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청년에게 '가진 것을 팔라'는 영양제를 주신 셈입니다. 하지만 이 청년은 이 영양제를 먹고 싶어하지 않고 울상이 되어 떠나가 버렸습니다. 우리는 각자 이런 저런 약점이 많은 이들입니다. 하느님은 매번 이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모종의 해결안을 제시하십니다. 우리는 실제로 이런 해결안을 일상 안에서 마주합니다. 자신의 성격 때문에 곧잘 화를 내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화를 내게 할 만한 사건과 사람을 주셔서 우리 스스로 생각하게 하십니다. 돈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돈을 사랑할 때에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꾸 경제적인 고난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로 인해 고통을 받고 결국 그것을 극복할 수 있게 자극시켜 주시는 셈입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에게도 그 자존심을 박박 긁는 무언가를 주셔서 그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겸손'을 키울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그런 모종의 목적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들은 아직 어린아이라서 그런 고통이 무작정 싫고 이해할 수 없고 피하고 싶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청년에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재물
예수님은 나아가 '재물'에 대해서 한마디 더 언급을 하십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라고 덧붙이십니다. 재물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빼앗기 참으로 쉽습니다. 사실 거의 모든 인간적 유혹이 '재물'과 연관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심지어 사도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죄악의 뿌리'라고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마저도 예수님의 이 발언을 듣고는 저마다 수근댑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즉 제자들은 아직도 재물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았음을 드러냅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
짐짓 불가능해 보이는 모든 일들 앞에서 우리는 절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불신'의 다른 단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기대어 청을 드릴 때에 하느님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구체적으로 그런 일들이 어떻게 벌어질는지는 각자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든 저든 하느님께 매달리는 사람에게는 조금씩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모든 원의와 욕구들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날이 다가옵니다.
따름과 보상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린 자신들을 예수님 앞에 내세웁니다. 예수님은 이 베드로의 말에 가감없이 대답하십니다.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무언가를 스스로 포기한, 버린 사람은 '박해'와 더불어 '현세의 보상'도 뒤따를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을 약속합니다.
박해
예수님을 따르면서 현세의 것을 포기하는 이에게 다가올 박해는 너무나 뚜렷합니다. 아주 간단한 예로 회사에서 2차로 퇴폐적인 술집을 가는데 그곳에 따라 가기를 거부하는 한 회사원을 봅시다. 당장 삐딱한 시선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래 니가 성인이란 말이지?' 그리고는 곧잘 빈정대는 말과 시련이 주어질 것입니다.
현세의 보상
헌데 이 현세에서 '백 배'를 받는다는 건 뭘 의미할까요? 당장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버리려는 사람에게 무엇이 다가온다는 말일까요? 이는 '소유'라는 개념에 대한 바람직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소유'하는 그 밖의 것을 자동으로 '배척'하게 됩니다. 우리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나머지 것들은 가지지 못하는 셈입니다. 우리가 하나에 집착하는 순간부터 나머지는 사라져 버리는 셈입니다. 그러니 반대의 방향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그 집착을 벗어 버리는 순간 우리에게는 나머지가 모두 한꺼번에 다가옵니다. 우리가 '내 집'의 집착에서 벗어나면 세상의 모든 장소가 나의 집이 되는 셈이고, 우리가 '내 가족'의 집착에서 벗어나면 세상의 모든 관계가 나의 가족이 되는 셈이고, 우리가 내 땅의 집착에서 벗어나면 세상 모든 것들이 나의 터전이 되는 셈입니다. 이런 이들이 바로 '선교사'라고 불리는 이들입니다.
영원한 생명
앞서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최종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특히 이 희망은 '박해'를 견디어 내는 데에 큰 도움을 줍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커지면 커질수록 '박해'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감소되게 마련입니다.
수난과 부활의 세번째 예고
<예수님, 제자들, 뒤따르는 이들, 박해자들>이라는 구도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앞장서 가고, 제자들은 놀라워하고, 뒤따르는 이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며 예루살렘에서는 그분의 뜻에 대항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마치 적군이 그득한 성을 치고 들어가는 왕과 그와 친분이 있는 장군들과 그리고 졸개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뜻을 세운 이와, 그 뜻에 경탄하는 이와, 그 뜻을 두려워하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어디쯤에 속해 있을까요? 우리는 주님의 뜻에 경탄을 하는 이들일까요? 아니면 주님의 뜻에 두려워하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앞으로 만나게 될 이들처럼 주님의 뜻에 반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일까요? 예수님은 일어날 일을 이전보다 보다 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설명하십니다. 마치 두 눈에 보는 듯 말씀을 하십니다.
어두움의 명확성
어두운 욕구에 사로잡힌 이들은 하는 행동이 매우 뚜렷하고 명확합니다. 그들의 일관된 방향은 충분히 예상할 만 합니다. 탐욕에 사로잡힌 이들 사이에 돈이 끼어들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명예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명예로운 자리가 주어졌을 때, 권력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권좌가 주어졌을 때에 일어날 일은 분명히 명확합니다. 그래서 사탄들은 충분히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런 이들의 어두운 욕구를 찾고 발견해서 움직이게 하고, 나아가 '선한 이들'을 무너뜨릴 계획을 잡습니다. 부당하고 불의한 일들을 통해서 선한 이들의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게 하고 '증오'가 자리잡게 하면 그들은 이 작업을 통해서 또 한 사람의 '죄인'을 얻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 악마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전혀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은 채로 진정 목숨을 내어놓을 지는 정말 예상도 못한 셈입니다. 그들은 승리를 예감했겠지만 하느님은 이 모든 걸 일시에 뒤바꾸어 버릴 작정이셨던 겁니다.
출세와 섬김
이 철없는 두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의 영광된 자리를 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욕구와 의지로 이루어질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수난의 잔에는 동참하겠지만 정해진 자리는 그들의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탐욕은 그 대상만 바꿀 뿐 모든 것에 미칩니다. 심지어는 거룩하다는 것마저도 우리의 탐욕의 대상이 되기 일쑤인 셈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원하는' 것들이 많은지 곧잘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무시하고 지나가기 일쑤입니다.
결국 그들이 원했던 것은 남들보다 '높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점에 대해서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매우 뚜렷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우리는 언젠가 그분의 길을 따르면서 참으로 많은 낮은 곳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가난한 이들이 될 것이고, 스스로 낮은 곳에 처신하는 이들이 될 것이며 많은 이들의 비난과 조롱을 자진해서 받게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 '인간'의 본성에 있어서는 참으로 힘겹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부당한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노력한 만큼의 상급, 그에 해당하는 철철 넘치는 상급을 받게 되고 우리의 기쁨은 넘쳐 흐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만큼의 상급을 받을까는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오직 하나 신경써야 할 것은 이 땅에서 얼마나 하느님께 충실하고 그분의 뜻을 받들어 섬길 것인가에 신경써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구원도 가늠하기 힘든 미흡한 존재들인 우리가 저 세상에서의 높은 자리를 탐하고 있으니 하느님 보시기에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라 생각합니다.
예리코의 눈 먼 이
이번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읽으셔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들은 여전히 눈이 멀어 있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소경인 상태입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번 예리코의 소경이야기를 통해서 '희망'을 잃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거지는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하며 생활합니다. 그리고 그러는 와중에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에 대해서 웅성이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는 홀로 내면에 작은 믿음의 씨앗을 심고 키워나간 셈입니다. 그러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가 지나간다는 이야기를 듣자 용기를 내어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우리들도 세상이라는 길가에 앉아 있으면서 하루하루 먹고 사는데 고심하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소소한 계기로 가톨릭 신앙에 대해서 접하게 되고 예수님에 대해서 들어 알게 되는 셈이었지요. 그러면서 우리도 모르게 우리 내면에 그 원의가 점점 커지기 시작하게 됩니다. 전에는 맛있는 밥이 좋았는데 이제는 영적인 가르침이 더 좋고, 전에는 멋있는 옷이 좋았는데 이제는 덕을 닦는 것이 더 좋고, 전에는 많이 가지는 것이 좋았는데 이제는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게 더 좋아지게 되는 셈입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옵니다.예수가 지나간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지나가?
예수가 지나간다니 무슨 말일까요? 우리는 어디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도 마을 밖에 길가에 앉아 사람들 사이에서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분으로 지나갑니다. 이 소경 앞에 지나가던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듯이 우리 앞에 지나가는 예수님도 보이지 않지만 지나가고 계십니다. 우리 각자는 그 예수님을 알아보아야 하지요. 누군가에게는 사제직을 통해서 지나가시기에 그 누군가는 사제직을 붙들어 버립니다. 누군가에게는 결혼성소로 지나가기에 우리는 그 성소를 붙듭니다. 누군가에게는 봉헌생활로 지나가기에 우리는 그 생활을 붙드는 셈입니다.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붙들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잠시나마 멈춰서게 만듭니다.
시련
하지만 부르짖는다고 다 끝난다면 참으로 쉬운 일입니다. 이 보이지도 않는 소경 앞에는 '사람들의 꾸짖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소경을 나무라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으로 어떤 선택을 할 적에 마찬가지 일들이 항상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나무랍니다. 그만 하라고 합니다. 신학교를 이제 겨우 들어갔는데 가족들은 그만하고 나오라고 합니다. 반장 일을 이제 시작했는데 자격이 없다고 하고 좋지 않은 일이 자꾸 생깁니다. 교리교사도 이제 겨우 시작했는데, 수도생활도 이제 겨우 시작했는데 왜 그리 반대가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붙들고 삶을 시작하나 싶은데 다가오는 건 '사람들의 꾸짖음'입니다. 이에 기가 꺾이기 일쑤입니다.
용기
하지만 이 소경은 더욱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용기를 더욱 내어 봅니다. 사람들의 의견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내밀한 곳에서 그동안 싹틔워온 '믿음'이라는 불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경은 예수님이 그냥 지나칠세라 그분을 더욱 붙잡아 세웁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부르십니다.
부르심
예수님은 불렀지만 그가 들은 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통해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를 꾸짖던 그 사람들이 이번에는 그에게 가보라고 합니다.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우리가 사람들에게서 반대를 받더라도 용기를 낸다면 결국 그 같은 사람들이 우리를 도와주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에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집니다. 길가에서 구걸하는 소경에게 겉옷은 전부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에게 나아갑니다. 우리 역시도 그분의 부르심을 듣기 시작할 때에는 '포기'가 뒤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더 가벼운 마음으로 더 전적인 신뢰로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질문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언뜻 자연스러운 대화 같다고 생각되지만 잘 살펴 보십시오. 예수님이 지금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무엇을 묻고 있는지 말입니다. 자비를 청하는 소경이 용기를 내어 앞으로 다가왔는데 예수님은 그의 의도를 물어 보십니다. 소경이 청하는 것이 눈을 뜨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저는 그러한 체험을 몇 번 해 보았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정작 자신의 병세가 나아지기보다는 전혀 엉뚱한 바램을 지니고 있는 경우입니다. 그런 이들은 원하는 건 얻을지언정 보다 본질적인 구원은 얻지 못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아뢰어 보십시오. 하지만 그것이 진정 원하는 것인지 되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대학'에 합격하고 싶은 것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입니까? 그런 일시적인 바램을 들고 있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보다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것을 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지금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개인적으로 저는 외칠 것입니다. '제가 사제로서 다른 이들을 구원의 삶으로 이끌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라고 말이지요. 저는 압니다. 제가 이 일에 헌신한다면 저의 구원 따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는 걸 말이지요.
다시 볼 수 있게
소경은 눈을 열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리고 원하는 걸 얻었습니다. 소경이 뜬 것은 자신의 육신의 눈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바라는 바를 얻은 소경의 마음에는 이미 큰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고, 영혼의 눈이 더욱 활짝 열린 셈입니다. 이 소경의 앞으로의 삶이 어떨지는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소경은 다니는 곳곳마다 자신의 '믿음'을 증거할 것입니다. 자신의 눈을 열어 다시 보게 해 주신 예수님을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당신 영으로 미리 알아채신 예수님이기에 이런 말씀을 건넨 셈입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는 다시 보게 되고,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