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기부

 

[마신부의 성경강의] 마르코복음 11장

겸손기도 1,444 2014-01-06 18:13:29
[마신부와 함께 하는 성경강의] 마르코복음 11장

예루살렘 입성

수난과 죽음의 연이은 예고에 이어 예수님은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예수님의 하나하나의 동작이 '비장함'으로 다가오지만 제자들과 둘러선 군중들에게는 그저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한 장면이 연출되게 됩니다. 이제부터 보다 더 깊이 들어가서 그 의미들을 파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묶여있는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이 나귀가 시사하는 바는 참으로 큽니다. 먼저 이 나귀는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함부로 갈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우리들은 자유로운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묶여 있는 이들입니다. 우리의 욕구에서 도무지 벗어나지를 못하고 그 욕구에 휘말려 늘 우중충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지요. 잠깐잠깐 얻어먹게되는 '쾌락의 풀'이 전부인 셈입니다. 하지만 묶여 있는 이상은 어디를 가지 못하지요.

'아무도 탄 적이 없는'이라는 의미는 다행히 이 나귀가 욕구에는 묶여 있지만 어둠의 영을 허락하지도 않았다는 말입니다. 즉 '대죄'에 얽매이진 않았다는 말이지요. 이로 인해서 이 나귀는 보다 더욱 우리의 현실에 적합하게 됩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허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둠 쪽으로 완전히 돌아서서 그 어둠의 영의 주인을 받아들인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린 나귀'라는 것은 여전히 성숙하지 않고 볼품도 없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신앙인으로서 여전히 성숙하지 못했고, 세상 안에서 나름의 자리를 차지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뭔가 특별히 걸출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말 그대로 어린 나귀인 셈입니다.

예수님은 제자 둘을 보내어 이 나귀를 '풀고' '끌고 오게' 하십니다. 나귀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어디서 나타난 이들이 자기가 묶여 있는 끈을 풀고 어딘가로 이끌고 갑니다. 성당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지요. 우리는 곧잘 다른 신앙인들, 즉 파견받은 신앙인들의 도움을 받아 눈을 뜨고 어딘지 모를 곳(하지만 예수님이 기다리는 곳)으로 이끌려 갑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두 가지이니, 하나는 우리 신앙인들의 선교사명이고 다른 하나는 비신앙인들이 체험하게 될 일인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늘 파견 명령을 받습니다. 하지만 선교는 커녕 제 자신도 추스리지 못하는 어린 나귀 꼴을 하고 있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타인을 신앙으로 초대하려는 굳은 마음을 지닌 이들이 있고 이들의 일은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나아가 우리 미성숙한 신앙인들은 그런 이들의 인도를 받으면서 얼떨떨합니다. 사실 끈이 풀리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는 지경이지요. 벌써 세상의 욕구들에 익숙해져 있으니까 오히려 '끌려' 가는 듯한 느낌이 싫기도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러 간다고 하긴 하는 것인데 사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는 셈입니다. 그러니 많은 것들이 싫고 귀찮아집니다.


거기에 서 있던 이들

나귀를 푸는데 주변에 사람들이 나서서 물어봅니다. "왜 그 어린 나귀를 푸는 거요?" 신앙인이 다른 이들을 초대하는 데에는 반드시 이런 이들이 주변에 있습니다. 이들의 의도는 '풀지 마라'라는 것입니다. 나귀는 묶인 채로 두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경우에 용기를 잃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이들에게 분명한 어조로 대답해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필요하셔서 그러는데 곧 이리로 돌려보내신답니다." 그러면 그들은 막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로막고는 합니다. 하지만 그 때에 흥분해서 다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잠시 거기에 몸 담은 뒤에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그토록 흥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나귀를 빼앗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제자들이 한 이 대답 안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자께서 이 나귀를 필요로 하십니다. 어리숙하고 미숙하고 볼품없고 얼마 전까지 욕구에 묶여 있던 존재이지만 주님께서는 이 나귀를 필요로 하십니다. 그리고 그 나귀를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보내십니다. 나귀는 예수님과 영원히 머물 수 있는 게 아니라 결국 자기 자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다만 예수님을 모셨던 그 기억을 간직하고 돌아오게 되겠지요. 그리고 원래 하던 일을 하게 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앙은 예수님을 만나고 현실로 돌아와 이전보다 더한 열심으로 현실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거기 서 있던 이들은 그 나귀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나귀 위에 '겉옷'을 얹어 놓고 사람들은 그 나귀가 가는 길에 '겉옷'을 깔았습니다. 나귀로서는 엄청난 대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절대로 '나귀'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수많은 성직자, 수도자, 봉사자 평신도들이 잊고 살아갑니다. 마치 우리 자신이 무엇이라도 되는 양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우리에게서 '예수님'을 빼고 나면 우리는 예전의 초라한 어린 나귀로 돌아오고 맙니다. 전혀 볼품없는 존재인 셈이지요. 헌데 사람들이 조금 잘 대해 준다고,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겉옷을 내민다고 마치 스스로가 무엇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다가는 예수님께서 내리시게 될 때에 더욱 초라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외침

"호산나!"

미사 중에 우리가 바치는 '호산나'의 노래와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미사의 시작과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예수님을 서서히 알아가고 맞아들입니다. 그리고 성찬의 전례의 시작 부분에 있는 '감사기도'문을 통해서 천상의 교회 안으로 나아가 결국 천상의 교회와 지상의 교회가 힘을 모아 이 '호산나'의 찬양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 순간 예수님은 바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고 그 곳에서 우리는 어린양의 희생 제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물론 지상의 교회에서는 '빵과 포도주'로 변화된 모습의 주님을 통해 그 제사를 바치는 것이지요. 우리의 눈으로는 그저 한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고 반으로 가르고 들어 바치는 모습 뿐이지만 그 가운데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엄연히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호산나'를 외칠 때에 더 마음을 모아 하느님께로 들어높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예수님의 신성을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고 있는 셈입니다. 지금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분은 그저 위대한 한 인간이 아닙니다. 이 분은 바로 '하느님의 이름'으로 다가오시는 구원자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이 모든 사람들에게 이 영광된 찬송을 불어넣어 주신 셈이지요. 만일에 이들이 부르짖지 않았다면 돌들이 소리쳤을 것입니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의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우리 조상의 다윗의 나라는 분명히 지나갔는데 '다가온다'고 표현을 하는 것은 바로 그 나라의 보다 천상적인 의미를 말하는 것이고 이는 곳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수난 제사로 인해서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는 진정 복될 것입니다. 그 나라에는 수많은 이들이 초대될 것이고 기쁨의 향연이 될 것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희망을 진정으로 극대화 시키는 부분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성경 안에서 '높은 곳'으로 표현되는 부분은 단순히 '하늘'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곳, 즉 하느님의 지배가 이루어지는 지극히 높은 천상 교회를 말하는 것이지요. 군중들은 이 노래를 통해서 지상 교회와 천상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는 셈입니다. 이는 우리가 드리는 미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니 우리는 이 노래를 통해서 그 순간 하느님의 아들의 권능으로 이 지상의 교회를 들어높여 천상의 교회와 일치 시키는 셈입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다

철도 아닌 때에 무화과나무에 다가가셔서 열매가 없는 것을 보시고 그 나무를 저주하십니다. 무화과나무로서는 억울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부분의 영성적 의미를 파악해 보기로 합시다. 먼저는 다른 모든 피조물은 인간의 권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을 지니고 있을 때에 피조물은 우리의 지배권에 순종합니다. 지금은 우리의 지배권이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서 굉장히 약화되어 있습니다.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과거 자연은 우리에게 먹거리와 입을 것을 너끈히 제공했지만 지금은 우리의 탐욕으로 인해서 극도로 노동을 해야 그러한 것들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탐욕은 만족을 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자연에게서 빼앗으려고 하지요. 사실 지금의 자연 순환은 이미 망가져 제 역할을 제대로 해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결국 살 터전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는 셈이지요.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열매'를 맺을 시기라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언제 열매를 맺어야 할까요? 그리고 주님께서는 언제 우리에게 다가오실까요? 열매를 맺는 철이 따로 있어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열매를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이 부분의 보다 심오한 영성적 의미는 이것입니다. 좋은 시기에 좋은 일을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변의 이웃들이 모두 상냥하게 대해 주는 데 내가 그들을 향해 미소를 짓지 못할 이유는 없지요.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무척이나 힘이 듭니다. 다들 나를 저주하고 비판하고 비난하는데 그들을 위해서 '기도'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겨운 일이지요.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 '열매'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 주님의 거룩한 굶주림은 때를 가리지 않으니까요. 우리는 그분의 사랑에 보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분은 우리가 가장 반항할 때에 우리를 감싸 안으신 분이십니다. 헌데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어둠을 드러내고 저항할 때에 그것을 감싸안지 못하고 불같이 화를 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열매 맺을 좋은 시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기에 열매를 맺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일련의 행위를 보란듯이 행하십니다. 심지어 나무를 향한 저주의 말씀도 들으라는 듯이 하셨지요. 이 부분은 보다 교육적인 의미가 있는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뒷부분에 나옵니다.


성전 정화

예수님은 성정에 들어가 열정에 사로잡히십니다. 그리고 복음서 안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폭력적인 장면을 연출합니다. 성전 안에 있는 장사치들을 모조리 쫓아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이 부분에서는 '성전'의 의미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성전'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그 건물이 '성전'을 의미할까요? 진정한 성전의 의미를 살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영혼'입니다. 우리의 영혼이야말로 진정 하느님을 위한 제사를 바치는 영적 공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헌데 우리의 영혼을 한 번 들여다보도록 하지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바로 '탐욕'이 들어 있습니다. 기도는 커녕 장사치들을 한껏 재어놓고 있는 셈이지요. 심지어는 가장 거룩한 지성소에도 이런 '탐욕'들이 지배하고 있는 셈입니다. 예수님이 만일 우리 가운데 계셨더라면 우리는 호된 꾸중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날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즉 우리가 죽는 날에 이러한 일은 반드시 일어나게 될 것이고 우리는 그저 '사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계셨던 그분의 진노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당신을 위해 기도를 드려야 할 공간에 온갖 잡다한 것들을 쌓아놓고 있었으니 말이지요.

그 뒤에 바로 나오는 구절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의 '악한 의도'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수님 앞에서 도리어 그분을 없앨 궁리를 하고 있는 이들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음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의 우리의 현실 안에서도 익숙한 일들입니다. 우리는 진정 거룩한 이들을 반기기보다 '두려워'하기 일쑤입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우리 스스로가 변화되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조금은 더 돈을 탐내고 싶고, 조금은 더 외모를 가꾸고 싶고, 조금은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은 그 미련을 도저히 버리지를 못하는 셈입니다. 그런 이들 앞에 참된 방향, 낮아지고 내어놓고 자기를 버리는 방향을 제시하는 이들은 '성가신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진리의 말씀에는 이미 귀가 닫힌 셈이고 자신들의 욕구를 섬기는 이들입니다. 어리석은 귀머거리 장님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라버린 무화과나무

무화과나무는 뿌리째 말라 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선포는 그대로 작용한 셈이지요. 만일 자연에 대한 지배권을 여전히 지닌 거룩한 누군가가 있다면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에도 여지없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동물들과 대화를 했고 과거의 교부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거룩한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자 새들과 물고기들을 모아놓고 그 앞에서 진리를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자연은 여전히 하느님을 섬기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 가까이 다가갈 때에 편안함을 느끼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물론 탐욕의 상징인 '문명의 이기'에 길들여져버린 이들은 자연 가까이 갈수록 도리어 두려움이 커지기도 합니다. 그들은 불편함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에어컨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각종 편의시설이 없으면 죽는 줄 압니다. 그리고는 불평을 입에 달고 살지요. 이런 이들은 산이든 바다든 가고 싶지 않습니다. 만일에 5성급 호텔에 머문다면 모를까 이런 이들에게 하느님의 섭리가 고스란히 담긴 '자연' 그 자체는 두려움일 뿐입니다. 이들은 자연을 '소비'하려고만 드는 이들이고 합당하게 다스리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문명'이 생산한 쓰레기와 같은 존재들이고 자연의 생태고리에 전혀 부합하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자연 속의 '암세포'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믿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의 바램은 미약하지만 그 자체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의 바램은 마치 스위치를 올리는 손가락의 힘과 같습니다. 우리가 어느 스위치 앞에 가서 스위치를 올리는가에 따라서 그 전체의 기계가 작동하듯이 우리의 믿음은 미약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는가에 따라서 그 전체의 시스템을 동작시키게 됩니다. 수많은 이들이 이러한 원의를 세상의 순환고리 안에서 소비합니다. '아 돈벌고 싶다'라는 원의는 적잖이 강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원의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누군가는 세상 안에서 성공하고 싶은 욕구에 따라서 모든 것을 정비하고 재조정하고 그에 발맞추어 모든 말과 행동을 이끌어갑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수많은 이들이 마찬가지의 원의를 가지고 그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 다투고 싸워야 하기가 일쑤입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찾아 나서고 그분의 뜻에 우리의 믿음을 둔다면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 이들은 자신의 기도로 하느님의 권능에 참여하게 되고 그들이 청하는 것을 모두 얻게 됩니다. 아니 청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얻게 되지요. 그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

믿음의 청원에 관한 참으로 유명한 구절입니다. 산을 옮기는 믿음. 하지만 여기에서 수많은 이들이 착각을 하는 것이 '산을 옮기려는 우리의 원의'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 주변의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 가운데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청하면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도식화해서 이해를 돕겠습니다.


1) 최초의 원의(하느님) - 그 원의에 부합하는 우리의 믿음 - 청원

2) 최초의 원의(나) - 그것을 하느님의 원의로 꾸미는 우리의 탐욕 - 청원


1)번의 순서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이 구절에서 설명하는 바입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산을 옮기시려는 원의'를 지니고 계신다면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이해하고 그대로 청원을 드릴 수 있고 그것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적지않은 그리스도인들이 2)번으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바라는 것을 이루려는 음험한 마음을 마치 '하느님이 원한다는 식'으로 뒤바꾸어서는 청을 드리고 나아가서 그 청을 이루어주지 않는다고 하느님을 원망하기 일쑤입니다. 참으로 장님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장 먼저는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 안에 일치시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만일 그런 작업에 제대로 된다면 우리는 당신이 원하시는 치유와 기적을 얼마든지 이룰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만한 믿음을 지닌 이들을 찾아보기가 좀처럼 힘이 듭니다. 수많은 이들이 자기 자신의 욕구의 노예가 되어 '신앙' 마저도 그런 관점으로 해석하려고 들기 때문이지요.

결국 예수님의 무화과나무에 대한 이 행동은 제자들을 위한 교육의 수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번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기도의 권능'에 관한 시청각 교육을 시켜 주신 셈이지요. 죽어간 무화과나무는 슬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천지의 창조주이신 분의 아들에 '순명'한 기쁨을 누렸을 것이지요. 그러니 지나치게 무화과나무를 '의인화' 해서 우리의 감정을 실어 예수님을 섭섭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여라

마지막 부분에서 '용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가진 '원의'는 하느님의 뜻에 부합할 때에 이처럼 엄청난 권능을 지니는 한편 반대로 한 인간에 대해서 '증오'로 작용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 파괴력의 종점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증오'는 언뜻 상대를 향해 복수하고 그를 멸망시키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바로 나 자신을 파괴하고 멸망시키는 셈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 후반부에도 나오고 예수님은 다시 그 구절을 반복하시면서 우리 내면의 '증오'를 경계하고 또 경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용서는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한

우리는 적지 않은 순간에 '복잡하고 음험한' 생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진리의 영을 담고 있는 맑은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지닌 것을 숨길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악'은 자신을 선한 것처럼 꾸미게 되고 그에 따라서 무척이나 많은 변명거리와 이유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을 도와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라고 하는 추상적인 질문에 우리는 '네 도와야 합니다.'라고 답변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바로 곁의 불쌍한 거지에게 1000원을 줄까요 말까요?'라는 질문에 우리는 곧장 변명거리를 찾아내기 시작합니다. 한 마디로 '도와주기 싫은' 셈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 '돈이 아까운' 셈이기도 하지요. 이런 상황은 우리 일상 안에서 곧잘 연출되곤 합니다. 우리 주변의 성가시고 궃은 일 앞에서 우리의 본성은 늘 '거부'를 표현하고 변명거리를 찾곤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간들의 복잡다단한 내면 사정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의 질문을 바로 파악해 내신 셈입니다. 예수님의 권한을 묻는 그들의 '부정적인 마음'을 파악하셨고 그들이 절대로 대답하지 못할 질문을 던지신 셈이지요. 참으로 통쾌한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음이 어두운 사람은 스스로 그 어두움을 곧잘 드러내곤 합니다. 그런 이들 앞에서 맞서는 것은 못이 가득 박혀있는 나무판을 맨주먹으로 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이들 앞에서는 나서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우리의 지혜가 작용한다면 예수님처럼 그들의 말문을 막을 반문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이 경우는 침묵 속에서 가능하면 그 자리를 물러나오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이 권유는 악의를 지니고 있는 이들을 마주한 '마음이 진실한 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무턱대고 모든 이를 피하는 것은 상책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심지어는 '선의'를 지닌 이들이 우리를 향해 충고하는 데에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나 스스로를 '진실하고 선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하면서 자리를 피하려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의 상태를 올바르게 바라보지 못하는 '장님'과 같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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