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기부

 

[마신부의 성경강의] 마르코 복음 12장

겸손기도 961 2014-01-06 18:19:53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예수님이 정리하는 신구약 성경 강의록입니다. 정말 그분의 말씀은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말끔한 느낌입니다. 포도밭과 소작인의 비유로 우리가 처한 현실을 여지없이 드러내어 주면서도 사람들에게 스스로 선택할 여지를 주십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철이 되자', 즉 인간의 영혼에서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열매를 거둘 때가 되자 당신의 '종'을 선택하시어 소작인들에게서 소출, 즉 당신을 향한 사랑의 열매를 요구하십니다. 헌데 이 소작인들, 즉 우리들은 이 종을 붙잡아서 매질을 하고는 빈손으로 돌려 보냅니다. 주인이신 하느님은 이를 참아 견디시고 다시 다른 종을 보내지만 이들은 더 최악의 상황으로 그 종을 다룬 뒤에 모욕합니다. 하느님은 이번에도 참으십니다. 그리고 또다시 종을 보내지요. 이번엔 대놓고 죽여 버립니다. 그 뒤에도 수도없이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주인은 마지막 희망으로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십니다. 헌데 이 소작인들이 그분을 받들어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가진 유산을 탐을 내고 죽이려고 달려들어 결국 죽여 버립니다.



유대인들은 진정 '우수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이 선택된 민족으로서 가지고 있는 축복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빛을 발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그만 잃어버리고 만 셈이지요. 하느님의 외아들에 대한 신앙 앞에서 자신들의 교만이 작용을 해서 그들 민족이 하느님의 상속자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 셈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 축복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신 셈입니다. 우리들이 바로 그 수혜자들인 셈이지요. 하지만 유대인들에게 일어났던 일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니, 실제로 일어나고 있지요.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유대인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살아오면서 수많은 가르침들을 받았지요. 번번이 하느님이 보내신 종을 만난 셈입니다. 그 종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전했지요. 세상에서 관심을 떼어라, 진정한 영적 가치를 찾아라, 용서하고 사랑하라,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이런 수많은 가르침들을 전하는 그들을 과연 우리는 어떻게 대했을까요? 우리는 '구원'은 바라면서 그 구원을 전하러 온 대상을 너무나도 쉽게 무시하고 말았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구하면서 그 영원한 생명을 직접 건네 주시려는 분을 무시한 셈이지요. 미사를 향한 우리의 자세만 봐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과연 미사 중에 예수님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을까요? 아니면 '의무감'에 사로잡혀 억지춘향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반성해 볼 문제입니다.



내버린 돌

주님이 하시는 일은 진정 놀랍습니다. 주님은 우리 눈에 아무리 미소하고 없어 보이는 것들도 절대로 무시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런 것들을 통해서 당신의 사업을 완성하십니다.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나약함을 한탄합니다. 일어서려고 해도 자꾸만 쓰러지고 좋은 일을 하려고 해도 자꾸만 넘어지는 자신의 약하고 미천한 모습에 그만 실망하고 맙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때가 하느님이 일하시는 때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지극히 약한 모습을 통해 가장 위대한 일을 이루시게 될 것입니다.



군중이 두려워

어둠의 영에 사로잡힌 이들은 '군중'을 두려워합니다. 반면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힌 이들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들은 죽음도 불사합니다. 이것이 영을 분별하는 하나의 지표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인기에 편승하려는 이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가 되기 일쑤입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빤한데도 사람들의 인기를 인식해서 옳은 것을 옳다하지 못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을 담고 있는 이에게는 차라리 침묵을 하면 할 지언정 그른 것을 옳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공동체의 모임 안에서 비춰지는 그릇된 행태 속에서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과감히 이야기하고 자신이 지닌 약점을 스스로 고발하는 것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들이 세상의 자녀들에게 '천시'당하는 것은 오히려 하느님께 나아가는 좋은 수단이 됩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

어둠의 세력들은 급기야는 예수님에게 덫을 놓을 생각도 합니다. 그래서 껍데기를 선하게 꾸민 이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감언이설로 그분의 마음을 꾀어 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먼저 찬양합니다.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이렇게 뱉어놓은 스스로의 말들을 따를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스스로의 위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심코 참례하는 미사 가운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신앙고백을 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미사를 마치고 현실로 돌아오면서 그런 말마디들을 전혀 따르지 않을 때에 우리는 이 복음의 어두움의 세력과 똑같은 '위선자'가 되는 것이고 주님을 시험하는 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데나리온의 주인

예수님은 데나리온의 초상과 글귀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묻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황제의 것'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렇다면 데나리온은 주인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지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라는 가르침 속에는 오히려 이들에게 반문하는 질문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너희 모두는 누구의 것이냐?" 그럼 그들은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이 질문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누구의 것입니까? 대답은 이미 우리가 해 오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시간을 더 많이 투자하나요? 우리의 영혼의 사정에 시간을 더 많이 두는가요? 아니면 더 가꾸고 꾸미고, 더 많이 벌고, 더 육신의 건강을 챙기고, 더 높이 올라가는 데에 시간과 노력을 쓰는가요? 이처럼 우리는 이미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우리의 주인을 결정하고 드러내고 있는 셈이지요. 마치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겉으로만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도 '가톨릭 신자' 이름표만 달고는 실제로는 세상을 더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주인'을 정한 셈이지요.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우리의 육신은 훗날 세상에 남게 될 터이지만, 우리의 영혼은 절대로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으로 영혼의 사정을 허비한 이들의 영혼은 그만 세상에 속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특징은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 논쟁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부활'을 무시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성에만 사로잡혀 '부활'을 부정합니다. 요즘도 이런 이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지혜만 믿으면서 신앙적인 내용들 중의 많은 부분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들에게는 종교는 '아편'과 같은 것으로서 역사 속에서 민중을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나왔다는 식의 내용을 더 쉽게 받아들여 믿고 있고, 신비적인 모든 것들을 부정합니다. 이든 저든 자신의 사고에 받아들여져 이해가 되어야지만 수용을 한고 나머지는 모조리 부정하고 맙니다. 역사적 예수의 존재는 인정을 하지만 그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말을 허무맹랑한 것으로 생각할 뿐입니다. 이들의 내면에는 근본 '교만'이 깃들어 있습니다.



언뜻 사두가이의 주장을 들어보면 참으로 합당한 일이기도 합니다. 한 여인이 7남자를 남편으로 맞아 들였는데 죽고나서 부활한 뒤에는 누구를 남편으로 취해야 하는지 곰곰히 생각을 해 보자면 참으로 골머리 아파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한 꼬마가 사탕을 한움큼 샀는데 자기 주머니는 하나 뿐이고 작아서 어디에다 보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과 별반 다르지 않은 셈입니다. 이 꼬마는 자기 자신에게만 사로잡혀 부모님의 존재를 잊고 있는 셈입니다. 부모님에게 달려가서 자신이 들고 있는 사탕을 맡길 수 있고, 심지어는 더 많은 사탕을 얻어낼 수도 있건만 이 꼬마는 세상에 자기 밖에 없다고 순간 생각하는 모양새입니다. 인간의 편협한 사고도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자신이 보고 듣고 인지하고 생각하는 선에서 그쳐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는 그 선에서 홀로 고민하고 힘겨워하는 셈입니다. 그리고는 쾌락주의에 빠지거나 허무주의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방법이 없는 대상들 앞에서 정신을 홀리는 쾌락을 선택하던지 아니면 모든 것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에 빠지는 셈이지요.



부활 그 이후

여기에서 예수님의 부활 그 이후의 실상이 증언으로 드러납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이 증언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여전히 세상의 생각으로 부활 이후의 삶을 연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의 가족 관계가 하늘에서도 여전히 유지될 것으로 상상하지만 하늘 나라에서는 모두가 '천사'들과 같아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의 부모와 배우자와 자녀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선물해 주신 인간관계가 되는 셈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나에게 다가오는 '사랑의 실천 기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를 선택하거나 자녀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배우자 선택 역시도 내가 알 수 있는 만남의 범위에서 이루어집니다. 한국 사람이 갑자기 엉뚱하게 알라스카 사람과 결혼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관계는 하느님의 선물인 셈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이러저러한 것들을 배워 나가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 관계는 죽음 이후에 재정비됩니다. 각자는 자신의 선택을 통해서 하느님에게 나아갈 수도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 이후에 이를 분명하게 인지하게 될 것이고 하느님의 심판의 결과를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는 이들은 이 심판의 결과를 수용하고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관계, 즉 하늘나라에 있는 모두를 천사로 수용하는 관계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이 구절은 한동안 저를 혼동스럽게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은 모두 죽은 사람들인데 왜 예수님은 이 구절을 들어서 하느님을 산 이들의 하느님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저로서는 논리적으로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저 구절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걸 입증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래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시기에 저 구절에 있는 모든 이들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두가이 사람들이 '사람들의 부활'을 부정하기에 그들이 여전히 신봉하는 위대한 이들을 두고 그들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입증한 셈입니다.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 당신이 살아 계시고 그리고 그분은 여전히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선대에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 역시도 죽은 게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특히 하느님을 열렬히 따른 이들은 더욱더 완전한 의미로 '살아있는' 이들이 되는 셈입니다. 우리 역시도 이 육신의 생명이 다하는 날에 이 땅에서의 존재의 양태가 사라질 뿐,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있게 됩니다. 그 뒤에 일어날 일은 예수님께서 간간이 드러내어 주셨습니다. 바로 '심판'이 되겠지요. 우리의 하느님은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가장 큰 계명

예수님의 계명 중에 으뜸은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사랑을 절대로 하나만으로 설명한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은 분명한 두 가지 선을 지니고 있습니다. 먼저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첫째'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웃을 향한 사랑이 뒤따릅니다. 그거나 그거나 똑같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실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인간을 향한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이 배제되고 나면 엇나가기가 쉽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보다 광범위하고 심도 깊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무턱대고 가난한 이와 약한 이를 향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와 가난한 이, 선인과 악인을 모두 감싸안아 하나로 아우르려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올바로 인지하지 못하면 곧잘 한 부류의 이웃을 사랑하면서 다른 부류의 이웃을 증오하기 쉽상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행동은 '인간적 사랑'으로만 바라본다면 이해하기 힘이 듭니다. 그 막대한 돈을 더욱 가난한 이웃을 향해 쓰는 것이 좋지 않았던가 하는 유다의 말은 언뜻 인간적으로 이해가 더 쉽습니다. 하지만 이는 '하느님 사랑'을 배제한 발언입니다. 우리가 때로 하느님에게 드리는 시간과 노력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정한 봉사는 '기도'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다른 한 편으로 우리는 '원수를 사랑'해야 하기도 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선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어리석은 일일 뿐입니다. 실제 그런 이들을 만납니다. 자신의 자식을 죽인 살인범에게 다가가 용서를 건네는 부모들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스캔들이 됩니다. 갈갈이 갈아 마셔도 모자랄 판에 용서라니요. 심지어는 적지 않은 신자들도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보다 진정한 길, 참된 평화의 길을 가르쳐 줍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예수님의 대답에 동의를 하면서 슬기롭게 대답하는 모습에 예수님이 그에게 남기신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멀리 있지 않다'는 표현이 썩 유쾌하게 들리지만은 않습니다. 왜 전혀 다른 표현으로 '너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이다'라든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이런 애매해 보이는 표현을 하신 것일까요? 이는 바로 그 율법 학자가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있을 뿐 여전히 그의 삶은 앞으로 개선 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올바른 방향을 분별하기는 하지만 그리로 걸어나가지는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빛을 인식하고 그리로 방향을 틀었지만 실천적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힘이 부족한 사람인 셈입니다. 머리로는 천국을 향해 나아가지만 삶이 여전히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에 얽매인 사람입니다. 제가 같은 표현을 여러번 달리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셨는지요? 이런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신자들 중에 머리로는 하느님을 쫓아가지만 삶의 실천으로는 그 자리에 머무르거나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들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은' 이들이지만 그렇다고 '그 안에 들어있는 이들'도 아닌 셈입니다. 그저 몇 걸음만 걸어도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을 이들은 여전히 그쪽만 바라보고 있는 셈입니다. 한편으로 예수님은 그의 슬기로운 대답을 반겼지만 그에게 '한 걸음만 더 걸어오지 않겠니?' 하고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인식만 하지 말고 실제로 원수를 사랑하라고 노력하라는 초대인 셈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인간적 생각은 보다 천상적으로 업그레이드 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율법 학자들은 자신의 율법적 배경 지식 아래에서 다가올 그리스도마저 자신들의 '율법 규정'안에 집어 넣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 분이 진정한 세상의 구원자라면 어느 틀 안에 머물러 계실 분이 절대로 아닙니다. 모든 지상의 권력과 권위들이 그분 앞에 엎드리는 것이 합당하고, 심지어는 다윗 자신도 그렇게 고백하고 있는 셈입니다. 결국 같은 율법을 율법학자들은 제 편의대로, 예수님은 보다 진실한 성령을 바탕으로 해석하는 셈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문제입니다. 교회법을 바라봄에 있어서 가장 핵심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곳에서 '법 준수'를 고수하며 가까이의 사람들을 무시하고 비난하는 일이 흔치 않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제대 위에 뭐가 좀 부족하다고 열심히 준비한 수녀님을 부끄럽게 하는 신부님들, 복사단이 뭘 좀 미흡하게 했다고 사랑하고 힘을 실어주고 보듬어안기는 커녕 대뜸 꾸짖기부터 하는 수녀님, 이제 겨우 신앙생활을 하려는 신자를 이끌어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의무규정'을 들이대며 겁을 주려고 하는 평신도들이 적지 않습니다. 과연 무엇이 우선인 걸까요?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위선자들의 전형인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라고 예수님은 분명하게 경고하십니다. 그들의 특징은 "겉꾸미기를 좋아하고 명예로움을 즐기고 높은 자리를 좋아하며, 돈을 사랑하고, 실제로는 사랑이 전혀 없이 오히려 도와야 할 사람을 괴롭히기 일쑤인 이들"을 말합니다. 따로 누구라고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여러분들 주변에 그런 이들이 보이면 조심하십시오. 하지만 '증오'하거나 뒷담화를 하지는 말고 그런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교회의 권위로 가르치는 바는 따르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양심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내용을 빈번하게 가르친다면 그분의 윗 장상에게 합당하게 알려 드리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마지막 판단은 '하느님'에게 맡겨져 있다는 걸 잊지 말고 그들을 심판하기보다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거듭거듭 부탁드립니다. 여러분들이 기도를 하고 또 한다면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의 내면이 더욱 성숙될 것이고 하느님도 그 기도를 물리치시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가난한 과부의 헌금

많은 돈이라는 것의 허상에 우리는 쉽게 빠져들곤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보다 내밀한 부분을 바라보시는 분이십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내면의 마음의 방향입니다. 사실 하느님 말고는 더 이상 기대할 곳이 없는 이들은 곧잘 하느님에게 모든 것을 내어놓곤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그들을 보살피게 되지요. 이들이 사는 것은 어찌보면 기적과도 같습니다. 이들은 그야말로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셈이지요.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활짝 열려서 세상의 것에서 마음을 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성프란치스코 성인과 같이 복음 말씀 그대로 특별한 소명을 받아 세상 것을 그대로 포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바라시는 것은 세상것을 대하는 마음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위한 목적으로 세상 것을 취하려 하지 말고, 영원을 위한 목적으로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취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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