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복음 4장(하느님 나라 비유
컬렉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 비유
- 해설 - 등불 - 저절로 자라는 씨앗 - 겨자씨 - 비유로 가르치기 - 풍랑
4장에는 풍성한 교리교육 재료가
들어 있습니다. 사실 교리교육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올바로 심어주는 것이고 그것이 일단 한 번 심기고 나면 알아서 싹이 트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4장의 전체적인 구조는 굉장히 단순합니다. 먼저 마음의 준비를 잘 시킨 다음에 하느님 나라의 비유를 잘 알려주고, 그리고 실제
삶으로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즉 불안 속에서 믿음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체험으로 알려 주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
여전히 예수님의 기적을 통한
'현세적 인기'에 편승해서 모여든 군중들을 피해서 예수님은 배 위에서 가르치십니다.(3장 참조) 그리고 그들의 마음밭을 비유의 말씀으로 잘
가꾸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아주 유명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나옵니다. 사실 이 구절은 따로 설명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강론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알아듣기 쉬운 비유를 들고 그리고 그것을 따로 제자들에게 해설도 해
주십니다.
삶에서 나온
비유
예수님의 비유가 당시 사람들의
생활 환경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에 유념해야 합니다. 따라서 모든 설교가들은 이 점을 유심히 지켜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칫 우리는 '언어의
폭력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예비자 교리 때에 성경을 설명하면서 적잖은 이들이 성경의 권수나 복음 사가들의 역사적
배경 등등을 설명하려고 애를 쓰면서 예비자들을 '질리게' 만듭니다. 그런 설명은 학교 교육 안에서 충분히 받은 것들입니다. 성경에 대해서는
그렇게 가르칠 것이 아니라 예비자들이 현재 처해있을 만한 상황 속에서 적절한 비유를 찾아 내어야 합니다. 문득 찾아온 누군가의 방문과 좋은
소식이라던지, 처철한 아픔 속에서 누군가의 도움이라던지, 이런 저런 현대인의 삶 속의 현실을 바탕으로 적절한 비유를 들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오늘날의 산업 사회에서는 '씨도 안 먹히는' 일이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예수님은 당신의 이웃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유심히 지켜보셨던 것입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누가 들을 귀가 있을까요? 호수
주변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들을 귀'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누구든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으로 예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진실함과 그 영적인 가치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렇게 말하니 엄청 어려운
느낌입니다만…), 즉 '의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을 의지, 의도만 있으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전혀 엉뚱한 것만을 추구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그저 흘러가 버립니다. 마치 사춘기 소녀가 남자 친구를 만나고 싶어 죽겠는데 엄마가
옆에서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씨도 먹히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벌써 그 내면의 의도가 '들을 마음이 없기'에 귀로 들려오고
있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셈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의지', 하느님께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갖추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
이 부분은 언뜻 이해하기 힘이
듭니다. 예수님, 아니 하느님의 원의는 모든 이를 구하는 것일진데 어째서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행여 선택된 이들이 존재하고 나머지는 멸망할 '운명'이라는 것일까요?
과연 '운명'은 존재하는 것일까요?
운명
우리에게 운명, 즉 정해진
방향은 존재할까요? 네, 존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선한 이들은 그 상급을 받고 악한 이들은 멸망할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운명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이 운명의 결정권은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진 이들로서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지닌 이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말의 의미로 되돌아가서 이해를 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의 의미는, '자기 스스로 어둠의 운명을 선택해서 멸망하는 이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단언하시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신 의도는 그런 이들이 지금 이 말을 듣는 동안이라도 마음을 바꾸라는 경고를 하고 계시는 셈입니다. 예수님의 말은
뒤바꾸면, '알아보고 깨달아 돌아오면 용서받을 것이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미묘하고 알쏭달쏭한 것 같지만 조용히 성찰해 보시면
예수님의 본 마음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당시에는 예수님의 제자들 조차도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바로 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비유를 듣는 동안 경각심을 가지고 깨달으려고 애를 쓰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깨닫고 알게 되는 순간 구원은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해설
그리고 예수님은 친절하게
제자들에게 그 뜻을 풀이해 주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해설에 대해서는 굳이 더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비유를 쓰시고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시고 그리고 친절하게 풀이해 주셨다는 걸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등불의
비유
빛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우리의
선한 의지도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감추려 든다면 그것은 빛이 아니고 수치인 탓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진정 빛으로 생각한다면 마땅히 드러내어야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신앙은 빛이 아니라 수치인 모양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는 걸 부끄러워하니
말이지요. 여기서 드러내라는 말이 길거리에서 외치라거나 길가는 사람을 붙들고 귀찮게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신이 배운 바를 삶으로 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사랑하라'고 배웠고 '용서하라'고 배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곁들여 받게 된다'는 것도
배웠지요. 하지만 왜 그리 실천하기가 힘이 들까요? 반면 우리는 일상 안에서 세상 소식은 어찌나 그렇게 자랑스럽게 떠벌리는지요. 자신이 아는
최신의 소식, 최신의 사건 사고들은 사정없이 떠벌리면서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진솔한 삶을 나누는 건 왜그리 부끄러워하는지요? 그
말인즉슨 우리가 여전히 세상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차를 한 대 새로 사면 자랑스러워하지만 우리 안에 십자가의 표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숨기려고 합니다. 결국 그런 이들은 하느님의 생명의 책에서 제외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이런 비유들을 트럭으로 갖다 듣는다 해도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들어도 들어도, 보아도 보아도 전혀 이해하고 깨닫지 못하여 결국 그들은 자신들에게 예비된 결과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파멸입니다.
주는 만큼 받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주고 있을까요?
솔직하게 말해서 사실 아무것도 주고 있는 게 없습니다. 받을 줄 뻔히 알고 주는 것은 주는 게 아닙니다. 투자하는 거지요. 눈에 뻔히 보이는
결과 속에서 받게 될 걸 알면서 준다면 그는 '자선가'가 아니라 '자본주의자'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받을 것이다'는 현세적인
의미의 되받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받을지는 우리 중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저 그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지요. 오직 그 '신뢰'하나로 내어 주어야 합니다. 또 반대로 우리가 주는 것이 '증오', '질투', '시기'와
같은 것이라면 그 또한 고스란히 받게 될 것입니다. 하긴 우리는 그런 어둠의 것들은 곧잘 타인에게 내어줍니다. 그리고는 돌려받지는 않으려고
하지요.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것들도 분명히 내어 준 이들에게 돌려주시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거룩한 사람은 더욱 거룩해지고
애를 씁니다. 반면 영이 흐트러져 있는 이들, 세상 일에만 몰두해 있는 이들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것들도 모조리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의 심층적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는 사람은 이 말이 얼마나 기쁨의 소식이며 또 반대로 '경고'의 소식인지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우리가 할 일은 '씨앗을
심고', '추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일은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눈을
뜬 이는 누구나 '심거나', '거둡니다'. 우리는 많이 심어야 합니다. 일단 제대로 심기만 하면 분명히 그 땅에 합당한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그것을 가꾸려고 기를 쓸 필요는 없습니다. '심는 작업'만 충실히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아직 줄기가
형성되지도 않았는데 열매가 언제 나오나 하고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열매는 때가 되면 나오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씨앗을 뿌리고 뿌리고 또
뿌려서 일단 심겨지게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하느님의 손길에 맡기십시오.
때로 많은 사목자들,
교리교사들이 심고는 열매를 기다리다가 지쳐버립니다. 하지만 그들의 사명은 열매를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추수꾼은 전혀 다른 이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걸 추수하려고 애를 쓰지 마십시오. 때가 되면 열매가 자라나 있고 전혀 다른 사람이 추수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억울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도 누군가가 뿌린 씨의 열매 덕을 보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지요. 한국에
순교자가 없었더라면 우리의 신앙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우리는 그 달콤한 열매를 맛보고
성장해 왔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의 삶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 하고 나머지는 하느님에게 맡기고 때가 되면 그 자리를 떠나거나, 아니면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만 주어진 기회 안에서 씨를 많이 뿌리려고 노력하십시오.
겨자씨의
비유
일단 하느님의 나라가 심겨지기만
한다면 그 결과는 엄청납니다. 과거에 코나 흘리고 지극히 이기적이었던 사람이 훗날 고향의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만큼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해
있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나라의 가르침도 일단 사람 안에 심어지고 나면 그 사람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다른 이들이 그 나무 그늘에 쉴 수 있을만큼 커져버리게 되지요. 하느님의 일은 놀랍기만 합니다.
비유
앞서 말씀드린 '비유'를 복음
안에서 새로이 요약해 두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생활화한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사람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바로 거기에서 가르칠 거리를 만드셨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모든 '교사들'은 스스로를 살펴야 합니다. 행여
나는 현학적이고 어려운 신학용어를 들이대면서 나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말을 지껄이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야 합니다. 정말 좋은 강론이란 신학
잡지에 게재될 강론이 아니라 '초등학생도 알아듣는' 강론이어야 합니다. 어려운 말을 곧잘 쓰는 사람은 자기가 아는 걸 전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자기가 아는 걸 '과시'하려는 것이 목적인 경우가 다분합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사실 배울 것이 없습니다. 좋은 스승은 괴상한 말을 툭툭 뱉는
사람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풍랑을
가라앉힘
앞서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의
실사판이랄까요? 눈 앞에 닥친 어려운 현실에 허덕이는 제자들 앞에서 에수님은 '잠'을 자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온 존재를 차지하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들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두려움과 겁이라는 것은 우리가 마주하는 대상을 '알지 못할 때' 나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하느님의 나라의 비유를 들었지만 아직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따라서 세상에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주종관계'가
분명했습니다. 태풍이 불고 불지 않는 것도 하느님의 뜻이고, 우리가 죽고 사는것도 하느님의 뜻입니다. 설령 죽더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일진데
우리의 두려움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세상의 주인이신 분을 '믿지 못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는 말씀을 남기신 것입니다.
이번 4장은 참으로 아름다운
'하느님 나라'의 장편 서사시입니다. 거듭 거듭 읽어보시고 온전히 이해하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두려움, 그 어떤 종류의 두려움이라도 훌훌
털어 버리시고 하느님을 믿으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