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기부

 

[마신부와 함께 하는 성경강의] 마르코복음 5장

겸손기도 1,645 2013-09-17 09:02:56
마르코 복음 5장

구마와 치유

5장은 2가지(엄밀히 말하면 3가지)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악령을 쫓아내는 '구마'이고 다른 하나는 '치유' 나아가 '부활'입니다. 본격적인 이해에 들어가기 전에 하느님에게 나의 영혼이 환하게 열리도록 도와주시라는 짧은 기도를 바치는 걸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마귀들과 돼지 떼

더러운 영의 특징
이야기는 속히 진행됩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호수 건너편에 이르러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라고 표현됩니다. 그리고 그의 특징이 나옵니다.

- 무덤에서 살았다.
그는 죽은 이들 사이에 머무릅니다. 더러운 이들의 첫번째 특징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산 이와 죽은 이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현세 생명의 끊어짐이 죽음이 아니라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죽은 이의 특징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아마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무덤을 파헤치기도 하고 시체들을 손상하기도 했겠지요. 이처럼 죽은 이들은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의 손아귀 안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익숙하지 않으십니까? 바로 현대인들입니다. 회색 빌딩 숲 속에 살면서 세상이 가르치는 가치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자신의 생각은 전혀 없고 그들이 주입시키는 생각에 따르는 이들, 바로 우리 현대인들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죽은 상태'나 다름이 없습니다. '선'을 행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증오하고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상태에 늘 빠져 영혼의 올바른 선택을 할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우리는 죽은 이들이고, 따라서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바로 우리 가운데 살아갑니다. 

-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이는 '구속'을 거부합니다. 그 어떤 연계를 거부하고 끊어 버립니다. 육체적으로야 쇠사슬만큼 튼튼하게 구속을 할 수 있는 것이 달리 있겠습니까마는 영적으로 우리가 느끼는 구속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순명'이라는 주제와 직결됩니다. 우리는 그 어떤 가르침도 거부하려는 반항적 기질을 품고 있습니다. 가볍게는 집안에서 가장의 명, 혹은 부모님의 명에 거부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회의 올바른 기강을 위한 틀도 거부하고 교회 안에서도 주임 사제의 명을 우습게 봅니다. 나아가 때로는 사제들도 주교님의 명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이런 불순명은 태초의 죄악에서부터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명을 거부한 첫 인간들이 우리 모두에게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이 복음서의 더러운 영도 모든 구속을 끊어버리는 모습을 잘 드러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명에 불순종할 때에 우리에게도 더러운 영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구원에 직결되지 않는 이상은 장상의 명이 아무리 어리석어 보여도 마땅히 순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순명을 하면서 기도를 하게 된다면 하느님께서는 필요한 일을 당신 측에서 진행하실 것이고, 순명 없이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고자 한다면 우리는 곧장 더러운 영의 조종을 받기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 소리를 지르고
더러운 영의 특징인 분주함과 소음입니다. 단순히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영혼의 분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머물러 성찰할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이 또한 우리의 모습에서 멀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쁩니다. 인터넷으로 세상 돌아가는 기사를 검색할 시간은 있어도 한 5분 하느님 앞에 앉아 머무를 시간은 없습니다. 텔레비전은 밤새도록 볼 수 있어도 기도할 시간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은 그런 분주함으로 채우고 있고 이런 분주함과 소음은 그야말로 악한 영의 특징입니다.

-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자기를 해치는 일, 자해를 공공연히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현대인들 중에는 자기도 모르게 '자해'를 하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자기에게 해가 되는 줄을 모르고 세상이 좋다는 활동을 모조리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관점은 주로 '영적인 관점'이라는 것을 늘 염두에 두십시오. 우리는 영적으로 어떤 자해를 하고 있을까요? 우리의 여가 활동은 곧잘 우리의 영혼을 해치는 활동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쉼'은 영육간에 조화된 쉼이 아닌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쉰다는 핑계로 술을 진창 마신다던지 몸을 더욱 피곤하게 하고, 나아가 영적으로도 해악을 끼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이들은 바로 자해를 하는 이들이고 그 주체는 자신이 받아들인 '더러운 영'입니다.

- 간교함
더러운 영은 예수님에 대해서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인 줄 고백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에 미묘하게 비꼬는 부분이 있으니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다가간 적도 없고 그저 그 지방에 도착했을 뿐이며 실제로 다가온 것은 그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마르코 5장 6절) 악마의 간교는 대부분 이렇습니다.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언제나 그 사실 안에 약간의 과장이나 거짓이 첨부됩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언뜻 사실을 전파하는 듯 하지만 그 안에 누군가를 향한 적대감과 악의가 깃들어 있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둘 사이를 갈라 놓는 활동을 곧잘 합니다. 행여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 가운데 이런 부류의 말들은 없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 어떤 악의 섞인 과장이나 허풍도 삼가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사회적인 이슈가 되는 것에 대해서 발언하는 적지 않은 이들은 자기 안에 은근한 적대감을 품고 있다는 걸 스스로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의 구마

- 신원을 밝히기
이제 예수님의 차례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처음에 하시는 일은 그의 이름을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변 동네 사람들이 절대 하려고 생각지도 않은 일을 시도하시는 것입니다. 그건 바로 '인격적인 만남'이었습니다. 타인을 돕는다며 '생각만'으로 돕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아프리카도 가고 남미도 갑니다. 오직 생각만으로 말이지요. 그리고는 자신이 도울 거창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계획보다 오히려 나의 곁에 있는 형제에게 한 걸음 다가가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가서 그의 이름을 물어보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살피기만 해도 여러분은 예수님의 권능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셈이 됩니다.

- 물질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
수많은 어둠의 영은 돼지떼를 선택했습니다. 주변의 하고 많은 것들 가운데 왜 하필 돼지떼였을까요? 그 돼지떼에는 사람들의 탐욕이 깃들어 있고, 어둠의 영들은 그 돼지떼에 붙어 있는 사람들의 집착을 이용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이는 전적으로 제 개인의 추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지금 눈 앞의 한 사람이 더 중요했고 그를 살리기 위해서 어둠의 영들이 바라는 것을 들어 주십니다. 천 마리쯤 되는 돼지떼보다도 한 사람의 영혼이 소중하다는 것을 예수님은 분명히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돼지떼는 모두 호수에 빠져 죽어 버리고 맙니다. 이는 분명한 어둠의 영의 작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고 다가오지만 일어난 일(재산의 손실)에 절망하고 진정 소중한 분을 도리어 쫓아내는 모습을 보입니다. 

- 상황의 반전
결국 예수님은 단순히 이 더러운 영에 들린 한 사람만을 보신 게 아니라 그 마을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던 실상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사람들로 하여금 선택하게 만드신 셈입니다. 사람들은 '재산'을 선택했고, '영원한 생명의 가르침'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이 때에 도리어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따라 나서기를 청합니다. 상황이 그야말로 역전되는 순간입니다. 이제 그 고장 사람들이야말로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임이 드러났고 지금껏 더러운 영에 들렸다고 생각했던 이가 구원된 모습을 드러냅니다. 

- 선교
하지만 예수님은 그가 따라 나서는 걸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사명을 맡깁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그리고 그는 한 명의 선교사가 되어 두려움 없이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 지방의 다른 모든 사람들이 놀라움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의 구마는 단순히 한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시시한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나약하고 때로는 쓰러지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시는 일을 올바로 인지하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한 명의 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야이로의 딸 - 딸을 사랑하는 회당장 아버지의 겸손
"한 사람이 청을 드려서 예수님이 일을 하신다." 라는 단순한 구조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보다 자세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회당장이 와서"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단순히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회당장은 당시 사회 신분으로 보면 엄청난 위치에 놓인 사람들이고 사람들의 존경과 주목을 받던 직분입니다. 이는 마치 한 주임 사제가 신자들이 가득 모인 곳에서 용하다는 한 평신도를 찾아 가는 모습과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지요. 그래서 이 부분이 중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한 아버지가 뭔가를 청한 것이 아니라 이 아버지는 자신이 누리던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내려놓는 모습을 보인 셈이지요. 그래서 그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밀쳐대며 따라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하혈하는 여인
소박한 믿음
이 가운데 하혈하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무려 12년 동안 그 병을 앓고 있었고 가진 것을 모두 탕진했습니다. 그렇기에 내면에 이런 저런 어두움과 원한이 자리잡을 만도 하건만 이 여인이 예수님 앞에서 가졌던 생각은 지나치게도 소박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이런 소박하고도 신실한 믿음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것입니다. 우리는 시끌벅적한 것을 좋아해서 커다란 스타디움에서 소리를 꽥꽥 질러 한 사람이 벌떡 일어서야 '와아~!!!!!'하고 감탄을 하지만 실제로 기적을 가져가는 이들은 이런 소박한 믿음을 지닌 채로 매일 미사에 묵묵히 참여하는 이들, 주임 신부의 모난 성정을 기꺼이 견디면서도 신앙의 본질을 잃지 않는 사람들, 집에서 혼자 조용히 촛불을 켜고 묵주알을 돌리는 사람들입니다. 뭔가 대단한 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주교님과 친구라고, 어느 신부님과 친척 관계라고 뭔가가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내면의 소박하지만 굳건한 믿음이 우리를 하느님 가까이로 이끌어줍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하혈이 멈춘 것을 느꼈습니다.

믿음의 시련
하지만 이 여인의 기적은 여기서 단순히 끝나 버리지 않습니다. 당신에게서 기적의 힘이 빠져나간 걸 눈치챈 예수님이 소위 그 '범인'을 찾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여인에게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었습니다. 그냥 숨겨 버리고 혼자 조용히 물러날 수도 있었지만 여인은 예수님의 앞에서 '두려워 떨며 엎드려' 일어난 일을 고백합니다. 이 믿음의 용기가 그녀에게 더 큰 위안의 말을 전합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단순히 하느님 앞에 고백을 하면 용서를 받는다고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으시지요. 하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인격적인 만남' 안에서 이루어지는 죄의 용서야말로 엄청난 가치를 지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제의 사죄경은 진실로 고백하는, 그야말로 '두려워 떨며 엎드려' 고백하는 신자에게는 큰 위안으로 다가옵니다. 물론 대충대충 주일미사 빠진 것이나 내던지고 도망가려는 신자들에게는 아무런 영적 위안이 없게 되지요. 그래서 가진 자는 더 받아 넘쳐 흐르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셈입니다. 이 하혈하는 여인의 소박한 믿음과 주님에 대한 굳건한 신뢰 안에서의 고백은 이 여인에게 '구원'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예수님에게 직접 이 말을 듣는 그 기쁨은 어떠할까요? 충분히 느껴보실 수 있으니 진솔한 고해성사를 준비해서 사제 앞에 나서십시오. 사제의 입에서 나오는 사죄경은 그 사제가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제는 예수님의 도구로서 그 사죄경을 여러분들에게 내려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수치를 하느님 앞에 드러내십시오. '구원'으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딸의 죽음과 아버지의 신앙
그러던 차에 딸이 죽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회당장의 신앙을 점검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딸이 죽었다고 알린 사람의 소식은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회당장에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이제 회당장은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정합니다. 그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집 안으로 들어서면서 사람들의 반응과 그 결과입니다. 사람들은 죽은 아이를 슬퍼하며 소란을 떨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 아이가 죽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바로 이 때에 회당장이 사람들의 편에 섰더라면 그 다음 구절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이라는 구절이 오히려 정반대가 되었을 것입니다. 회당장과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아내었겠지요. 하지만 회당장은 예수님을 끝까지 신뢰하기로 한 셈입니다. 만에 하나 딸이 되살아나지 못할 때에 자신이 받게 될 비난과 조롱을 회당장은 짊어진 셈입니다. 그리고 가족과 예수님 일행은 아이가 있는 곳으로 갑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결과를 받게 되지요.

탈리타 쿰!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에 '죽음의 잠'에 빠져 있던 아이가 일어나게 되는 장면입니다. 소녀는 일어나서 걸어다니고 사람들은 놀라 넋을 잃습니다. 이 감격의 순간에 잠시 머무르셔도 좋습니다. 복음서를 내려놓고 회당장의 마음이 되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그 부모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요?

함구령
이 일은 아무에게도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제자와 그 부모들만이 알아야 했지요. 하지만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걸어다니니 이보다 더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 알릴 필요도 없는 일이었지만 예수님은 거듭 알리지는 말 것을 명하십니다. 당신의 복음 선포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명성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행동반경을 극도로 제한하고, 또 결과적으로 예수님에게 죽음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겸손과 애정
그리고 또 하나 잊지 않으시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행한 업적이 마치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이 오히려 오랜 굶주림에 배가 고플 소녀를 걱정하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만일 어느 설교가가 이런 일을 해 내었다면 자신이 행한 업적에 대한 자랑 스러움에 당장 그 주인에게 교만한 모습을 드러내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함구령과 더불어 소녀를 챙기십니다. 그분의 겸손과 따스함이 느껴지시는지요? 이 분이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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