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케치북

 

[이종훈] 8월 12일 주님의 길

8월 12일 주님의 길

 

연일 보도되는 일본정부와 극우인사들의 언행에 언짢고 화난다. 보잘 것 없지만 마음만은 사뭇 간절하게 매일 밤 함께 남북화해와 일치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도무지 진전이 없어 보인다. 세상에서 하늘나라의 민으로 사는 것, 이방인과 나그네처럼 사는 게 쉽지 않다.

 

세상일에 무관심하게 사는 게 이방인과 나그네로 사는 것은 아닐 텐데. 그렇다고 이도저도 아니고 어정쩡한 마음으로 사는 것은 비겁하다. 득도한 도사가 아니니 모든 것을 초월해 살 수도 없다. 마음이 어우선하고 가끔은 조급해진다.

 

성전세를 바치라는 요구에 예수님은 원칙을 고수하지 않고 간단하게 처리하셔서 더 이상 끄럽지 않게 하셨다(마태 17,27).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도 그렇게 처리하셔서 그들이 쳐 놓은 올가미를 피해가셨다(마태 22,21). 예수님은 비겁하셨나? 세상일에 무관심하셨나?

 

세상 속에서 복음을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선포하는 게 참 쉽지 않네. 누군가 쳐놓은 안전한 울타리 속에서 앵무새처럼 원론적인 이야기만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니 자꾸 그 속으로 빨려들어 가 마음이 끄러워진다. 이러나저러나 하느님 말씀을 잘 못 듣기는 매 한 가지다. 앵무새 마음은 고요하지만 무디고, 세상일에 대한 관심은 구체적이지만 끄럽고 어둡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몹 슬퍼하였다(마태 17,23). 되살아나신다고 했는데 그들은 왜 슬퍼했을까? 잘 못 들었나, 아니면 알아들을 수 없었나? 부활을 추억이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 정도로 생각했었나보다. 제자들은 슬픔을 넘어 절망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지만 부활하신 주님, 손과 발의 상처를 그대로 간직하고 계신 바로 그분을 뵙고는 기뻐하였다(요한 20,20). 예수님은 비겁하지도 무관심하지도 않으셨다. 세상의 상처를 고스란히 다 받으셨다. 그분도 고민하고 아파하고 슬퍼하고 화도 내셨다. 하지만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를 잃지 않으셨다, 죽기까지.

 

예수님, 가장 아름다운 인간이신 예수님, 참되고 진지하게 살고 싶지만 바람뿐인 것 같습니다. 쉽지 않네요. 그래도 세상 안에 내어 놓으신 당신의 발자국을 잘 따라가려고 나름 노력합니다. 더디 가고 뒤뚱거려도 참아주고 기다려주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주님의 길을 잘 따라가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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