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3일 토마스 사도 축일, 믿음 선물
토마스 사도는 의심이 많았던 사람이라기보다는 강직하고 진솔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하느님이 어떻게 사람이 될 수 있고, 하느님이 어떻게 죄인으로 사형을 당하며, 또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는가? 이런 일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믿는다는 것은 어쩌면 거짓이지 않을까?
그런데 토마스는 스승을 좋아했다. 스승의 친구 라자로가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다른 제자들은 스승을 죽이려고 하는 이들이 있는 곳을 가기를 두려워서 스승의 발길을 돌리려고 했지만(요한 11,8), 토마스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라고 말하며 오히려 다른 제자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비겁함을 꾸짖기도 했다. 그의 행동은 과도한 의협심보다는 스승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한 것이었다고 보고 싶다.
그러면서도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예수님께서 떠나실 준비를 하시면 제자들에게 당신이 가시는 길을 그들이 알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라고 반문했다. 맞는 말이다. 어디로 가시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지도 않았고, 부활, 하늘나라에 자리를 마련하기, 하늘 길을 터놓기 등 보통 사람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시는데, 어떻게 ‘네, 잘 압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가? 만일 그들이 정말 알았다면 스승을 그렇게 버리고 도망가지 않았을 것이고, 또 다락방에서 문을 꼭 걸어 잠그고 두려워 떨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스승의 길을 몰랐지만 침묵했지만 토마스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이런 토마스가 고맙고 위안이 된다. 사실 우리도 토마스와 같은 심정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은 듣지만 그것을 말 그대로 믿는 것은 어렵다. 물론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고, 우리의 믿음 안에는 언제나 불신이 포함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정말 믿음은 선물이다. 이런 토마스에게 예수님은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셨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러 모습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실 수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을 것 같은 끔찍한 그 당시 그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토마스를 위해서. 그러나 정작 토마스는 자신의 말처럼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는 않았다(요한 21,25). 사실 그도 무척 괴로웠을 것이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은 주님을 뵈었다고 즐거워하고 불신과 두려움의 고통에서 해방되었는데, 자신만 홀로 여전히 어둠 속에서 살고 있었고 그 시간이 벌써 여드레나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그 시간은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 않는 고통이었다. 주님을 뵙는 순간 그는 그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그리고 믿음도 필요 없게 되었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것은 기억이었다. 그날과 주님과 함께 지냈던 모든 시간들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었다.
“예수님,
저희에겐 그런 기억과 추억이 없습니다.
읽기 어려운 두꺼운 성경, 전해들은 이야기, 위대한 성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뿐입니다.
이 모든 것을 섭렵해야 비로소 주님을 믿게 된다면
지금 믿음을 포기하겠습니다.
믿음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었다면
당신과 만났던 보통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요구하지 않으셨겠죠.
그 대신 어린이와 같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주위 눈치 보고 마음과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어린이들처럼,
모르면 모른다고, 믿지 못하겠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말할 수 있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웃을 만나면
즉각적으로 차오르는 연민이 이끄는 대로 행동한다면,
주님께서 저와 함께 계신다고 알려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느님은 어려운 분이 아닐 테니까요.
믿지 못해 괴로워하는 토마스를 위해
당신의 상처를 기꺼이 보여주셨던 예수님은
토마스를 참 사랑하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 사랑으로
믿지 못해 주저하고, 우왕좌왕하는 제게
믿음의 선물을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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