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케치북

 

[이종훈] 4월 16일(성주간 화요일) 배신의 상처

4월 16일(성주간 화요일) 배신의 상처

 

왜 유다 이스카리옷이 주님을 배반했는지 성경은 전하지 않는다.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이유도 그렇다. 여러 추측들만 있을 뿐이다. 배신은 캄캄한 밤에 낭떠러지에서 떨어짐과 같다. 신뢰가 무너질 때 희망도 함께 무너져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배신할 것을 아셨다. 게다가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마태 26,24).”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유다가 배신해서 주님이 그런 수난과 죽음을 당하신 것도 아니고, 그렇게 열정적으로 주님을 따르던 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해서 주님이 더 큰 고통을 당하신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당신이 세 번이나 예고하셨던 대로 당신이 가셔야 할 길을 묵묵히 가셨다. 배신의 피해자는 오히려 그들 자신이었다. 베드로는 서럽게 울었고, 유다는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예수님은 그들이 배신할 것을 알고 계셨다. 본래 사람은 그러함을 알고 계셨다는 뜻인 거 같기도 하다. 그러해도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처음 사랑하셨던 그대로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 유다의 발도 씻어주셨고 그에게 빵을 적셔주셨다(요한 13,26). 적셔진 빵이 얼마나 먹기 쉬운가! 예수님은 제자들을 끔찍이도 사랑하셨다. 나도 그렇게 사랑하신다.

 

주님이 가시는 곳은 어디라고 갈 거라고, 주님이 마실 잔을 자신들도 마시겠다고, 주님과 함께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약속하며 자신의 충성을 호언장담했던 이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아니라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하느님을 배신한 상처는 하느님이 아니라 나의 것이다.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그렇게 되어버리고 만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매 번. 그래서 그런 변명도 할 수 없을 지경이지만 왠지 억울하다고 말하고 싶다. 내 안에 새겨진 그 프로그램이 주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보다 훨씬 강력한 것 같다. 그 프로그램은 내가 만들어지는 때부터 내 안에 새겨졌지만 주님의 사랑은 훨씬 나중에 알게 되지 않았나? 아마 유다는 그 억울함과 자신에 대한 실망을 견디지 못해 그런 선택을 했지만 베드로는 슬피 울었다. 죽지 말고 울자. 내가 실수로, 못나서, 지켜드릴 힘이 없어서, 진실을 말할 용기가 없어서 주님을 저렇게 만든 것이라고 핑계대고 변명하며 서럽게 울자.

 

세월호 참사 5주기이다. 왜 침몰했는지, 왜 구조하지 않았는지 아직도 잘 모른다. 그러니까 흉흉한 소문들이 생겨난다. 입에 담기도 두렵고 그래서 귀를 막고 싶은 그런 이야기들이 사실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란다. 사람이 아무리 나빠도 그렇게 나쁠 수야 없지 않을까? 이런 마지막 나의 희망도 또 나를 배신할까?

 

예수님, 이 죄인을 용서하시고 다시 고개를 들어 주님께만 희망을 두게 하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당신 품에 저를 숨겨주시고, 그 안에서 주님께 용서를 청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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